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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외 언어로 禪心 일깨운 참 스승”

기자명 법보신문
  • 불서
  • 입력 2009.03.17 15:39
  • 댓글 0

『춘성-무애도인 삶의 이야기』/김광식 지음 / 새싹 펴냄

어느 날 춘성은 통금 시간이 넘어서 밤길을 가고 있었다. 방범순찰을 하던 순경이 춘성에게 물었다. “누구요?” 춘성이 어둠 속에서 즉각 대답했다. “중대장이다.” 그 소리를 들은 순경은 목소리는 노인인데, 중대장이라고 하니 의아해서 들고 있던 후래쉬로 춘성을 비추었다. “아니? 스님 아니시오!” “그래, 내가 중의 대장이지! 맞지?”
치열한 수행자로 격외의 법문으로 무소유의 삶으로 어느 것 하나 걸림이 없었던, 우리 곁을 가장 가깝게 스쳐 지나간 무애도인 춘성 스님<사진>. “나에 대한 일체의 그림자도 찾지 말라.”는 유언으로 온전한 기록을 갖추지 못한 채 풍문과 전설로만 전해지던 스님의 일대기가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됐다.

부천대 김광식 교수는 춘성 스님 관련 기록들을 수집하고, 인연 있는 스님과 불자들을 일일이 찾아 인터뷰하는 지난한 작업 과정 끝에 446쪽 분량의 『춘성-무애도인 삶의 이야기』를 출간했다. 1부 ‘일대기’ 2부 ‘내가 만난 춘성’ 3부 ‘일화로 만나는 춘성’으로 구성된 책은 욕도 마다하지 않았던 파격적인 법문과 무애의 삶, 평생을 걸쳐 보여줬던 선지식의 투명한 살림살이를 제대로 복원해 냈다.

춘성 스님은 13살 때 만해 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인연을 맺었다. 엄혹한 일제 암흑기, 삼일운동의 여파로 스승이 감옥에 갇히자 절 마당에 땔감을 가득 쌓아 놓고도 “스승이 왜놈들에게 붙잡혀 고생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제자인 내가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있느냐”며 불도 때지 않은 냉방에서 이불도 덮지 않고 수행했다. 또 만해 스님이 옥중에서 쓴 「조선독립의 서」를 세탁물과 함께 들고 나와 「독립신문」에 실어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널리 알린 것도  춘성 스님이었다.
춘성 스님의 참 모습은 역시 육두문자를 마다하지 않은 격외의 설법과 전혀 걸림이 없었던 기행에서 찾을 수 있다.

춘성 스님이 강화도 보문사에 주석할 때 육영수 여사가 자신의 생일날 청와대로 초청을 했다. 생일에 와서 좋은 법문을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자 춘성 스님은 고관대작들이 모두 모인 그 자리에서 주장자로 법상을 쿵! 한번 치고 말했다. “오늘은 육영수 보살이 지 에미  뱃속에 들었다가, ‘응아’하고 XX에서 나온 날이다.”

춘성 스님이 하루는 서울 은평구의 진관사 상량식에 초청 법사로 참석했다. 불에 타 버려 없어진 대웅전의 상량식이었다. 양복을 입고 참석한 춘성 스님은 비구니 스님의 장삼 저고리를 빌려 걸치고 법상에 올랐는데, 몇 분간 묵언으로 일체를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대중 향해 이렇게 말했다. “혼수에는 (남자)XX가 제일이요, 불사에는 돈이 제일이다.” 그리고는 상량을 하기로 되어있는 대들보에 5000원 지폐 한 장을 탁! 걸어놓았다. 도올 김용옥은 이런 스님의 격외의 법문에 대해 “춘성 스님의 욕은 언어적 집착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해 한 말이며, 그 자체로 『벽암록』을 뛰어넘는 우리 시대의 공안”이라고 극찬했다.

춘성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바랑을 메고 전국을 누비며 다녔다. 만해 스님을 은사로 모셨지만 용성 스님에게 화엄을 공부했고, 만공 스님 회상에서 대오(大悟)를 이뤘다. 춘성 스님은 추운 겨울에 골방에서 삼매에 들 정도로 참선에 몰입하다 손과 발이 동상에 걸려 만년에 손톱과 발톱이 썩어가는 고통을 겪었으며, 17일 단식으로 죽기 직전 관음보살을 친견한 일은 너무나 유명하다.

특히 춘성 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망월사 선방에는 이불을 덮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스님 또한 80의 노구(老軀)에도 대중생활을 하며 철저히 원칙을 지켰다. 어느 날 스님들이 추위에 떠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한 신도가 수십 채의 이불을 보시했지만 스님은 이불이 들어오는 날로 마당에 쌓아놓고 모두 태워버렸다.

춘성 스님은 또한 철저히 무소유자였다. 길을 가다가 노숙자가 추위에 떨고 있으면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서 옷을 다 벗어주고 팬티 바람으로 뛰어갔고, 옷이 단벌이라 세탁을 하게 되면 옷이 마를 때까지 발가벗은 채로 대가사를 수한 채 견뎠다.
춘성 스님은 걸망에 죽비 하나, 틀니, 주민등록증과 팬티 한 장을 남기고 속진의 때를 벗었다. 스님의 육신이 활활 타오르는 다비장에서 명진 스님을 비롯한 후학들은 스님이 생전에 즐겨 부르던 ‘나그네 설움’을 목이 터져라 부르며 작별을 고했다.

저자 김광식 교수는 “춘성 스님은 산에 들면 산승(山僧)이요. 저자거리에 나서면 적나지인(赤裸之人)으로 무애도인의 삶을 온 몸으로 보여준 시대의 선지식이었다”고 격찬했다. 1만5000원.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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