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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청심]산수유에 대한 짧은 기억

기자명 법보신문

법련사 주지 보경 스님

산수유가 노란 꽃을 피웠다. 뜰에 자라는 한 그루일 뿐이지만 제일 먼저 봄소식을 알리고, 늦서리에도 빨간 열매를 달고 있어서 우리 절에서 사랑받는 나무이다. 도심 포교당에 살다보면 어금니 빠지듯 통째로 계절을 망각하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어디에 무슨 꽃이 있다면 나가 보고 싶기도 하다. 지금 같으면 섬진강변의 벚꽃도 그렇고, 지리산 산동마을 산수유 군락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반추되는 기억들 중에 유난히 선명한 것은 시집가듯-절 밥이 눈치 밥이라는 말처럼- 온전히 새 삶에 익숙해져야 했던 행자시절에 본 조계산의 모든 것이다.
 
『논어』에 보면 재아가 공자님께 “삼년상(喪)은 너무 길고, 일 년이면 족하지 않느냐”고 묻는 부분이 나온다. ‘사계절이 한 바퀴 돌고나면 모든 변화를 다 본 것이니 충분하지 않느냐’는 재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던 거다. 물론 공자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상중(喪中)에 쌀밥과 비단옷이 편안하겠냐는 공자의 물음에 재아는 “편안 합니다(安)”했다. 사뭇 당돌함이 배어나와서일까. 공자는 “편안하면 그렇게 하라(女安)”하고는 그가 나가자 “재아는 참으로 어질지 못하구나” 하였다. 일종의 뒷말을 하신 거다. 이처럼 나도 생나무 같은 시간을 한 바퀴 돌고나니 그 일 년에 절집의 살림이 어지간히 가늠 되었다.
 
당시 ‘도성당(道成堂)’은 노스님들 처소였다. 네다섯 분이 도량에 계셨는데, 한두 해 사이에 거의 입적(入寂)하셨다. 산중은 말없는 곳이라 누가 돌아가시면 바로 대종을 울려서 대중에게 알린다. 생각해보면 ‘열반종’을 그렇게 자주 들었던 적도 다시없었다. 도성당은 큰절에서 유일하게 정남향이라 오후 늦게 까지 햇살이 바르게 들어 어린 내 눈에도 노스님들 거처로는 알맞아 보였다. 이 처소 한 쪽에 커다란 산수유가 몇 그루 있어서 이른 봄이면 노란 꽃을 피워 산중의 분위기를 일시에 바꿔놓았다.

이어서 나뭇가지마다 싹이 돋아 하루가 다르게 산이 모습을 바꿀 즈음이면 텃밭에 돌을 고르는 운력이 초파일 준비와 함께 목전에 있어서 봄은 빠르게 망각되었다. 그때 계셨던 한 노스님은 우표 한 장도 개인과 사중의 것을 구분하여 쓰실 정도로 공사가 분명하였다. 그런데 누구보다 대중공양·예불에 철저하신 노스님 한 분이 “내생에는 부자로 태어나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 적잖이 놀라기도 했었다. 그렇게도 일생이 고단하셨을까? 노란 산수유만 보면 그때의 일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당나귀를 가진 한 사람이 있었다. 이 당나귀는 짐을 나르느라 쇠약해져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당나귀를 곡식밭에 풀어 놓으면서 호랑이 가죽을 씌웠다. 사람들은 호랑이를 보고 도망치기에 급급했기 때문에 그는 이 방법을 즐겨 썼다. 어느 날 한 밭지기가 활을 들고 호랑이를 잡기 위해 풀숲에 숨어 있었는데, 곡식을 먹고 즐거워진 당나귀가 울부짖는 바람에 들키고 말았다. 밭지기는 그 자리에서 당나귀를 죽여 버렸다. <인도의 우화>

얼마 전에 있었던 야구 중계에 온 국민이 열광하는 것을 보고 오죽 사는 재미가 없으면 이럴까 싶기도 했다. 장미의 비밀은 장미에 있고 사람의 비밀은 사람에게 있다. 꽃을 보는 우리와 달리 꽃 자신은 아름다움을 모른다. 마찬가지로 행복은 세상이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나의 관점에서 생겨난다. “발밑을 살피라”[照顧脚下]하지 않던가.

당나귀가 울음까지는 숨기지 못했고, 산수유가 제자리에 다시 피었다.

법련사 주지 보경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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