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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칼럼]반야의 꽃들

기자명 법보신문

이기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봄이 지나가고 있다. 봄은 아름다운 꽃들의 계절이다. 삭막했던 겨울 산에 진홍빛 진달래가 피면서 봄이 시작한다. 이어 겨우내 추위에 떨었던 아파트 단지에 목련이 하얗게 피어난다. 그리고 벚꽃, 개나리, 라일락이 황량했던 도회에 눈부시게 찾아온다.

나는 목련을 사랑한다. 어릴 때 자랐던 시골에선 목련을 보지 못 했다. 30대 후반에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서울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봄에 피는 목련의 아름다움에 눈뜨기 시작했다. 수년 전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 단독주택에서 20여 년을 살았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와 강아지 세 마리와 함께 함께 살았다. 그 집 뜰에 목련이 한 그루 있었고 봄이면 하얀 목련꽃송이들이 뜰에 가득했다. 내 서재가 2층에 있었는데 베란다에 나서면 목련 꽃송이들이 하염없이 다가왔다. 그러다 어머니가 떠나시고 강아지 두 마리가 죽고 우리 동네가 재개발되면서 부득이 아파트로 옮기게 되었다.

그해 4월 나는 프랑스 남해안 니스에서 개최되는 국제학회에 참석하게 되었었다. 학회에서 돌아오면 목련이 다 저버릴 것 같아 나는 밤마다 베란다에 나가 목련꽃들에게 대비주(大悲呪)를 읽어주었다. 그 해 유난히 많은 목련꽃들이 피었고 처음으로 내 손이 닿는 곳까지 다가왔다. 나는 한없는 아쉬움으로 그 꽃들을 어루만졌다. 20여 년을 같이 산 그들과 헤어지는 것이 서글펐기 때문이다. 학회에서 돌아오자 다른 집들의 목련은 다 저버렸는데도 우리 집에는 목련꽃 몇 송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도 나와의 이별이 아쉬웠는지 모르겠다.

영랑(永郞)은 5월 어느 날 모란이 지고 떨어진 꽃잎마저 시들어버리면 그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한양 섭섭해 운다고 노래했다. 나에게도 목련이 지고 천지에 그 자취도 없어지면 그냥 그 한해가 다 가버린 듯 허전한 느낌을 금할 수 없다. 목련은 내가 치열하게 살았던 20여년, 지금 생각하면 행복했던 시절, 어머니와 강아지들과 함께 살았던 시간의 추억 속에 가득히 피어있기 때문이다. 양희은은 “아픈 가슴 빈자리에 하얀 목련이 핀다”라고 노래했다.

세존께서 어느 날 영축산의 법회에서 아무 말씀 없이 꽃 한 송이를 들어보이자 대중이 모두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다만 가섭존자가 빙그레 웃었다고 한다. 이에 세존께서 “나에게 정법의 안목(正法眼藏)을 갖추었고, 열반에 이른 미묘한 마음(涅槃妙心)이며, 상없는 실상(實相無相)인 불가사의한 법문(微妙法門)이 있느니라. 이는 문자를 세우지 않고(不立文字) 말 밖에 따로 전하는 법(敎外別傳)이니 이를 마하가섭에게 부촉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로부터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선불교가 시작되었다 한다.

왜 세존께서 아무 말씀 없이 꽃을 들어 보이셨을까? 왜 가섭존자가 이를 보고 빙그레 웃으셨을까? 알 길이 없다. 다만 꽃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세존에겐 온 우주가 하나의 아름다운 꽃송이로 보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깨달음의 내용을 대중에게 말씀 없이 전하셨고 가섭존자가 그 뜻을 말씀 없이 알고 빙그레 웃었는지 모르겠다. 우리 중생에게는 이 세계가 고통스럽고 더러운 예토(穢土)로 보이지만 깨달은 분들에겐 청정한 한 송이 아름다운 꽃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한다.

세존은 우리에게 온 우주가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은 하나의 꽃송이임을, 세계일화임을 가르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닐까? 관음경에 비체계뇌진(悲體戒雷震)이라고 설했다. 부처님은 자비를 몸으로 하여 우레와 같이 우리를 가르치신다는 말씀이다. 지금 지천으로 피어있는 아름다운 봄꽃들이 모두 우리에게 깨달음의 소식을 우레와 같이 전하는 반야의 꽃들이 아닐까? 우리의 눈이 잠들지 않았다면.

이기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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