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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만다라] 65. 수행자의 자세

기자명 법보신문

‘청정’ 본분 잊으면 향기만 탐해도 큰 도둑

이 세상에서 선도 악도 다 버리고
육체의 욕망을 끊어 순결을 지키고
신중하게 처세하는 사람을
진정한 수도승이라고 할 것이다.
                                             - 『법구경』

위의 게송 역시 법정 스님 편역 『법구경』 제19 ‘도를 실천하는 사람 장’에 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삶이 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도를 실천하는 삶’이 가장 고귀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법구경』에서는 ‘도를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도를 실천한다는 것’에서 도(道)란 ‘진리’, ‘참다움’, ‘진실’등으로 의미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거짓을 떨쳐버린 삶,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삶, 진리 그 자체를 살아가는 등으로 다시 의미를 추구해 보자. 악함을 버리고 선함만을 추구하는 것도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가치론에 빠지고 도덕주의에 빠진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선악의 가치와 도덕적 가치는 1차적인 단계에서는 진리일 수 있지만, 진리를 향한 더 높은 단계에서는 인위적이고 편파적인 한계를 노출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부응해서 ‘선이다 악이다’라고 하는 것은 잘못하면 자신의 편견에 빠지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따라서 선과 악이라고 하는 객관적인 가치를 설정하기 보다는 참다운 수도승에게는 끝없이 자기 내면의 세계를 살피는 수행이 선행되어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자신의 내면에서 질투, 인색함, 속임수, 성냄, 거짓, 욕망, 탐욕 등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것이 수도승의 근본이 된다. 겉모양으로 말을 잘하고, 욕심 없어 보이고, 승려의 모습을 갖추고, 걸식으로 살아가고, 고요한 모습을 지켜간다고 해서 참다운 수도승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분법은 진리로 가는 길 방해

악의 근원을 뿌리째 뽑아 버린 사람, 흙탕물을 가라앉혀서 찌꺼기 까지 제거해 버린 사람, 어떠한 경우에도 다시는 욕망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사람, 진리 그 자체로 자신의 삶을 이룩해 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수행자이며 수도승이 된다는 가르침이다. 외형적으로 고요한 모습을 지키더라도 어리석고 무지하면 성자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 선악의 갈림길에서 언제나 모든 생명을 위한 최상의 선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을 때, 참다운 성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도를 실천하는 사람의 삶은 이와 같이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서 진정한 의미의 대자유를 얻는 것이며, 이를 부처님께서는 해탈 열반의 경지라고 일깨워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참다운 수행자는 선과 악이라고 하는 이념의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현실문제에 있어서도 엄격히 자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생전에 일타율사스님께서 자주 들려주시던 도향적(盜香賊)이라는 법문이 있다.

수행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수행에 전념하다가 몸에 병을 얻은 청정수행자가 있었다.  어느 햇살 따뜻한 아침에 수행에 지친 몸을 연못가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연꽃 향기가 수행자의 코끝을 스쳐지나갔다. 그 향기가 너무나 감미로워서 연꽃의 향기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그 때 연못을 지키는 수신(水神)이 나타나서 수행자에게 ‘향기를 훔친 도둑’이라고 꾸짖는 것이다. 그 이유는 수행자답지 않게 연꽃의 향기에 탐착해서 수행하는 마음을 잠시 잊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뒤에 이번에는 몹시 험상 굳게 생긴 남자가 연못에 와서 연꽃은 물론 연뿌리까지 캐서 등에 지고 가버리지만 수신은 그냥 바라볼 뿐 그를 꾸짖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조금 전에 꾸중을 들은 수행자는 너무나 불공평한 수신의 태도에 불만을 토로하였다. 이에 수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세상의 탐욕에 젖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연꽃뿌리를 송두리째 훔쳐 가더라도 그것은 탐욕이 발동된 행위에 불과하지만, 청정(淸淨)과 소욕(少欲)을 근본으로 삼는 수행자가 연꽃의 향기를 탐하여 잠시나마 수행의 본분을 잊어버린 것은 향기를 훔치는 도둑이 되기 때문에 야단을 쳤다는 것이다.

흰 천의 티끌이 더 크게 보이는 법

원래 검은 색의 천이라면 굳이 더러운 때가 묻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흰 천에 검은 물감이 묻는다면 커다란 오점이 됨을 두려워하라는 이야기와 같다. 청정 수행을 표방하고 세상의 존경을 받는 수행자는 한 순간의 모습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욕구를 따라서 행동해서는 도둑이 된다는 엄한 꾸중인 것이다.

바람에 스쳐지나가는 향기를 잠시 탐익(貪溺)해도 선신(善神)으로부터 경책을 받는데, 종교라는 미명아래 참다운 자기 성찰이 없는 우리들은 선신의 경계 밖에 이미 내던져져 있는 존재인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우리의 혼탁한 일상은 이미 부처님의 꾸중을 듣는 곳으로부터도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법구비유경』의 말씀과 같이, 눈이 어두운 사람이 등불을 지키고 있은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혜로서 스스로를 가다듬어서 세상의 탐욕에 물들지 않고 언제나 세상을 맑히는 청량제와 같은 참다운 수행자가 요청되는 요즈음이다. 스스로 올곧게 서 있기만 한다면, 자신의 그림자도 따라서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부처님은 조용히 타이르고 계시는 것이다.

본각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그림=이호신 화백, 수화자문=조계사 원심회 김장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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