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사 속 불교와 윤달

기자명 법보신문

예수재 시작은 고려…조선시대 이후 각 사찰서 성행

윤달이 되면 전국의 각 사찰에서는 다양한 윤달맞이 행사를 마련한다. 그 역사를 되짚어보면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와 윤달이 밀접한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전에서 윤달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 없기는 하지만 각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풍습이나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불교와 윤달의 관계는 매우 밀접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학자 홍석모가 지은 세시풍속서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윤달이면 사찰에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봉은사에서는 윤달이 오면 서울 장안의 여인들이 다투어 와 불공을 드리며 돈을 자리위에 놓는다. 이 같은 모습이 윤달이 다 가도록 끊이지 않는다. 또 이렇게 하면 극락에 간다고 하여 사방의 노인들도 함께 모여든다. 서울과 외지의 여러 절에서도 대개 이런 풍속이 있다”고 「동국세시기」는 윤달의 풍속을 소개했다. 중부 이남 지방에는 윤달을 맞아 ‘성돌이’를 했다고 한다. 성이 있는 마을의 부녀자들이 성터에 올라가 성 줄기를 따라 도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탑돌이와 흡사한 것으로 극락에 가고자 하는 염원에 기반한 것이다.

이와 함께 경기도에서는 윤달에 사찰 세 곳을 순례하면 모든 액이 소멸되고 복이 온다고 하여 많은 부녀자들이 절을 찾았고, 영남 지방에서도 윤달이면 사찰에 가는 풍습이 있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불교 전문가들은 예부터 윤달에 불교적 행사가 많은 이유에 대해 “덤으로 있는 달인 만큼 같은 정성으로 불공을 드려도 평달보다 업장 소멸의 효과가 영험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풍습과 함께 윤달이 되면 사찰에서는 생전예수재를 봉행했는데 평소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 주력하지 못했던 공덕과 수행을 덤으로 생긴 윤달에 닦도록 독려하는데 더 큰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생전예수재에 관한 기록은 고려 고종 33년에 제작된 판본 『불설 예수시왕생칠경』과 『불설 관정수원왕생시방정토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경전의 의례집인 『예수의범』, 『예수시왕생칠역이찬요』 등에서는 생전예수재 의식의 절차는 물론 나이에 따라 경전을 읽을 횟수와 제단을 차리는 법까지 서술돼 있어 조상들이 ‘생전예수재’를 매우 중요한 불교 의식으로 봉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윤달 생전예수재가 성행한 것은 고려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이후에는 예수재를 지냈다는 기록을 곳곳에서 다수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