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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①조계종의 종지와 종조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09.06.16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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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宗 하자더니 천도재로 빚 갚나

불교의 세속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가 조계종의 정체성과 수행풍토를 비판하는 기고문을 최근 보내왔다. 이에 본지에서는 △조계종의 종지와 종조 △간화선: 성철 선사와 화두 △재가불자: 신행과 역할 등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산 태고사 건립 공사 광경.

유교를 국시로 하던 조선은 승려 신분을 국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지독한 불교 탄압이 계속되었다. 1910년 조선왕조가 망하고, 그 이듬해 1911년 6월에 총독부의 ‘조선사찰령’이 실효되었다. 이 법령에 의거하여 30본사는 각각 사법(寺法)을 제정하여 총독의 인가를 얻어서 본 말사에 시행했다. 1934년에는 일본 승려들에 의해, ‘일조불교합병안(日朝佛敎合倂案)’이 중추원에 제의되고, 1935년에는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조선불교총본산 박문사’를 설치하기 위한 등록 서류가 총독부에 제출된다.

이에 반발한 조선의 스님들은 ‘조선불교선교양종총본사 각황사’를 세우기로 뜻을 모아 비로소 1938년에 낙성한다. 절 이름을 고심하던 끝에 태고사(太古寺=지금의 조계사)로 정하고, 종명도 조계종(曹溪宗)으로 바꾸어, 종조(宗祖)를 태고보우 스님으로 하여, 1941년 5월 1일에 ‘조선불교조계종총본사태고사법’을 총독으로부터 인가받는다. 1945년 8월에 해방이 되자 바로 다음 달에 승려대회를 열어 ‘조선불교조계종총본사태고사법’을 폐기하기로 한다. 일제의 잔재를 자정하려는 일환이었다. 1946년 5월 ‘조선불교교헌(朝鮮佛敎敎憲)’이 제정 공표하고, 초대 교정에 박한영 스님을 추대한다. 아직 ‘대한민국’은 없었다.

그러나 ‘조선불교교헌’도 1954년 4월 불국사에서의 승려대회에 의해 그해 6월 20일 제13회 중앙교무위원회를 끝으로 폐지된다. 그리고는 ‘한국불교조계종’으로 개칭하여 종헌과 법전을 정비하고자 한다. 이런 와중에 1954년 5월 20일자로 소위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가 발표된다. 고기 먹고 처자식 둔 승려들은 왜색 불교이니 절에서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 후에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우여곡절 끝에 1962년 4월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한다.

 
조선불교조계종 창종과 함께 종조로 모셔진 태고보우 선사.

세상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1945년 해방이 되었으나 남한에는 3년간 미군 군정청이 관리했다. 개신교의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근본으로 미국과 그 미군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종교정책은, 그 후 이승만 정부를 거쳐 지금까지 고리에 고리를 물고 연속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지만, 2년도 채 안 되어 6.25가 터지고, 1953년에 휴전 되고, 1960년에 4.19가 일어나고, 1961년에 5.16이 터진다.

1949년에 농지개혁이 되던 당시에도 일제가 1911년에 만든 ‘조선사찰령’이 여전히 유효했다. 그 이후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결과적으로 불교의 재산은 만신창이 난다. 1962년에 ‘불교재산관리법’이 만들어졌다. 이 법은 1987년에 ‘전통사찰보존법’으로 새 옷을 갈아입는다. 그러나 국가권력에 의한 ‘통제’와 ‘관리’는 여전하다. 최근 조계종 총무원에서의 이 법의 새로운 개정 관계로 설왕설래 하는 것도 긴 역사의 한 연속선상에서 있는 일이다.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 온 것은 삼국시대이므로, 시조는 그 때부터 따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시조(始祖)에 대한 의식이 구체화된 것은 결국 유교적인 종법제(宗法制)가 확산되면서 부터였다. 유교의 봉건적 지배질서가 민가에까지 확산되면서 양반가와 마찬가지로 불가의 승려들도 승보(僧譜)를 만들게 된다.

영조 40년(1764년)에 사암채영 선사가『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를 만들어 태고 선사를 해동 선종의 종조(宗祖)로 기세(起世)하여 스님들의 사승관계를 상세히 기록한다. 이때에 활용한 것이, 서산 스님의 증손자벌인 월저도안 선사가 지은 『불조종파지도』(1688년) 등이었다.

이 계보도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서산 스님의 문도들이 자신들의 스승을 추모하기 위하여 당시의 고승인 편양언기 선사에게 비문을 청한 적이 있다. 1625년 지은 이 비문에 따르면, 서산 스님의 계보는 고려 말의 태고보우(1301~1382)에서 내려오고, 다시 태고 선사는 원나라에 유학하여 ‘임제종 양기파’의 후손 석옥청공 선사의 법을 계승한다.

태고 스님을 시조로 하는 의식은 일제 때도 계속되었다. 특히 일본의 선종계보인 ‘조동종과 구별하려는 조선 스님들로서는 임제의 법손이라는 의식을 강하게 지켜갔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하던 안진호 스님도 이런 의식 속에서,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가 출간된 이후에 출가한 승려들의 행적을 제방으로 조사했다. 그러나 유고가 되고 말았다. 통도사의 경운 형준 스님은 이 유고를 기초로 그 이후의 승려들도 사승을 밝혀 1983년에 『증보불조원류』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것이 유일하게 소목(昭穆)이 정연한 소위 스님들의 대동보(大同譜)이다.
  즉, 태고보우 이전에 스님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스승 제자의 관계를 규명할 수 없기 때문에 태고 스님을 시조로 하는 것이다. 지금도 스님들의 약력에 석가세존의 70십 몇 세손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도 모두 태고를 빼고는 어불성설이다. 태고 스님을 시조로 하는 역사의식은 임진왜란 이후부터만 계산해도 400년을 전후한다. 즉 화두 참선하던 선승을 할아버지로 생각하면 살아온 세월이 이렇게 길다는 것이다. 태고사를 지은 것도 그렇고, 태고사 간판을 조계사로 고쳐 단 것도 그렇고, 조계종이라 종명을 단 것도 그렇고, 이 모두 선종(禪宗)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조계사를 보면 선종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십구재 천도를 많이 해서 그 수익금으로 부채를 갚은 것이 그리도 자랑스러운 일일까? 혹시 천도를 많이 해서 죽은 영가들을 극락왕생 시켰다고 하더라도, 선승 집안에서는 부끄러운 일이다. 종지는 무엇이고, 종조는 왜 있는 것인가?

신규탁 교수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은 금년 여름 안거에도 2,000여 명에 달하는 선승들이 선방에서 화두 정진을 한다. 또 수많은 학승들이 불경을 연찬하고 조사어록을 강의하여 선승들의 안목을 높여주고 있다. 또 산중에서 가람수호 하는 스님들도 수행대중을 옹호하고 있다. 이들이 조계종의 희망이요, 꽃이요, 봉황이다. 북극성이 있을 자리에 있으니, 뭇 별들이 그것을 중심으로 도는 것이다.

신규탁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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