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잃어버린 영감(靈感)

기자명 법보신문

[논설위원]이기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지난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많은 국민에게 깊은 충격과 슬픔을 안겨 주었다. 평소에 그분의 정치철학이나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전직 국가원수가 과연 그렇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는가? 우리나라의 정치문화가 과연 그 정도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가? 경제적으로 우리나라는 세계 10대 강국의 문전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정치는 왜 그 모양인가? 한때 이건희 전 삼성회장이 우리나라 경제는 전 세계적으로 A급인데 정치는 D급이라고 해서 정치권으로부터 호된 시련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은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공과에 대하여 논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뇌물을 받고 정치적 후원자들의 부정을 도와준 구체적 증거는 아직까지 검찰이 제시하지 못했다.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지만 범법의 뚜렷한 물증도 없이 전직 국가원수를 검찰이 과연 그렇게 대접했어야 했는가?

솔직히 말해보자. 전직 대통령 중에서 그분 보다 더 부정한 정치자금으로부터 자유로운 대통령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많은 국민들은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계, 검찰, 언론이 합작하여 전직 대통령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인간적 수모와 고통을 주어 결국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백만의 국민들이 그 분의 서거를 애도하는 행렬에 줄을 선 것이다. 군사정권 때 천문학적 정치자금을 갈취한 전직 대통령들도 아직 건재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떠나서 그분의 서거가 진정으로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까닭이 또 있다. 그분은 퇴임 후 고향에 돌아가서 사는 최초의 전직 대통령이었고 앞으로 그러한 대통령을 다시 보기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분은 퇴임한 전직 대통령이 국가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새로운 롤 모델(role model),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셨다.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퇴임 후 조지아주의 땅콩 농장으로 돌아가 전직 대통령이 고향의 지역사회와 세계평화를 위하여 기여하는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왜 우리나라는 그것이 불가능한가?

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농촌출신이다. 어쩌다 대학교수가 되어 서울에서 수십 년을 보냈지만 은퇴한 후 고향에 가서 살 엄두를 못 내고 있다. 그렇다고 어릴 때 살던 고향이 어찌 그립지 않겠는가? 간혹 고향에 갈 때가 있지만 젊은이들이 떠나 활기를 잃어버린 고향을 보고 서글픈 마음으로 서울에 돌아온다. 폐가가 많이 생겼다. 친척들이 살던 집에 가도 반가이 맞아주는 사람이 없다. 어르신들이 떠나시자 자식들이 모두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가버렸다. 직장, 자녀들의 교육문제 때문에 도시로 떠나버린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화마을에 돌아오자 한적한 시골마을은 관광객이 북적대는 활기찬 곳으로 변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와 서민이 된 대통령을 보려고 봉화마을에 몰려들었다. 그들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동네사람들과 막걸리도 마시고 나무도 같이 심고, 언덕 풀밭에서 미끄럼도 타고, 환경문제도 같이 논의하는 소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퇴직한 공직자가 국가의 발전에 기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전직 대통령에게서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시골에 사는 전직 대통령은 단지 그 존재만으로도 국민들에게 엄청난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그러한 소중한 영감의 참으로 안타까운 상실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자전거를 타고 황혼의 시골 들길을 달려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진정 슬픈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기화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