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생명 죽이지 않는다(不殺生)’는 계율을 지켜야 할 출가수행자가 살육의 현장에 뛰어드는 것은 그 자체로서 슬픈 일이다. 율장에서 가장 엄격히 금하고 있는 ‘바라이죄’를 어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해 스님의 말처럼 ‘쇠퇴한 사회에 개인의 행복이 있을 수 없고, 패망한 국가에 국민의 자유가 있을 수 없다’는 것 또한 냉혹한 현실이다. 외세의 침략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것을 보면서도 ‘불살생’ 계율만 고집한다면 이 또한 대승의 정신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나섰던 사명대사가 ‘형봉(衡峰)에서 토란 굽기 실로 내 소원인데/ 벼슬에 살찐 말이 어찌 본분이랴. 장해(瀆海) 십년 동안 부질없이 수자리[戍衛] 살았구나. 향성(香城) 어느 날 돌아갈 기약을 정할는지….’라고 회의하면서도 끝내 전쟁터를 떠나지 못했던 것도 ‘고통 받는 중생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분율』이나 『범망경』 등 율장에서는 출가자는 살생도구를 준비해서도 안 되고 군사의 사절이 되어서도 안 된다고 못 박는다. 심지어 칼 찬 사람에겐 설법조차 말라는 구절까지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종종 이런 율장의 표면적인 행위규정을 넘어서 적극적인 실천을 지향한다. 그 중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과 『금강명경』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경전에서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은 나라를 잘 다스리고 지키려는 국가지도자의 지침서로 일컬어진다.
정병조 동국대 교수는 인왕(仁王)의 어질 ‘인’자는 참을 ‘인(忍)’자와 동음(同音)으로 풀이한다. 즉 어질다는 것은 비판과 칭찬 사이에 동요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반야를 체득할 때 비로소 국토와 국민을 평안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토라는 개념 또한 단순한 국경선의 의미를 넘어 부처님의 진리가 살아서 숨 쉬는 곳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뜻임을 강조한다.
이런 측면에서 호국의 참뜻은 일반적인 국방이나 애국의 개념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오히려 호국불교는 정법을 수호하고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가장 적극적인 대승의 보살행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호국불교는 정치적으로 변질되거나 왜곡되기도 십상이다.
신라시대 일부 대찰 스님들이 칼을 들고 민중들과 다투거나 고려시대 스님들 수백 명이 무신정권 세력과 노상에서 전투를 벌였던 일, 또 일제강점기 불교계가 호국불교라는 이름으로 전투기를 헌납하고 해방 후에도 사회의 아픔을 외면한 채 무조건 정권을 추켜세웠던 일들은 호국이 아니라 반호국이라는 지적이 많다. 참다운 호국불교의 이념은 단순한 민족주의를 넘어 불교의 정법주의, 자비주의, 평등주의의 실현을 통한 불국토 건설에 있는 까닭이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