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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만다라] 70. 탐욕과 원한의 관계

기자명 법보신문

탐욕은 타인에게 고통주고 원한 쌓는다

 

그림=이호신 화백, 수화자문=조계사 원심회 김장경 회장.

남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자신의 즐거움을 삼는 자는
원한의 사슬에 얽매여
벗어날 기약이 없다.
                             - 『법구경』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다른 모든 생명에게 고통을 주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먹고 사는 일에서부터 일상의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 다른 생명의 희생 위에 우리의 삶이 비로소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생명을 이어가는 삶은 모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남에게 즐거움을 주기보다는 서로 고통을 주고 있는 존재다. 때문에 우리의 앞에 펼쳐지는 삶은 늘 서로 괴로워하며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게일 A. 아이스니츠가 쓴 『도살장』을 읽고 있으면 인간의 삶이 얼마나 남에게 고통을 주고 원한의 사슬에 얽매여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미국의 거대 도살장의 현장을 보고한 『도살장』에는 생산성과 경제성을 높여서 도살장 주인이 최대의 이윤을 남기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죽어가는 소들도 소를 도살하는 사람들도 인간 이하의 참혹한 환경에 내몰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원한의 사슬이 천 겹 만 겹으로 얽어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율하지 않고는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모든 생명을 하등동물에서 인간까지, 그리고 다시 절대자 신으로 계층을 나눈 서양의 사상에서는 동물은 인간의 삶을 위하여 만들어진 희생물로 애초부터 상정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동일하게 삶의 괴로움을 느끼는 모든 생명은 삶의 무게도 동일한 가치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생명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고 있다. 원한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육류를 식탁 가득 올려놓고서 사람들은 희희낙락 즐거움을 삼고 있음도 반성해볼 일이다. 

‘원한의 결정체’로 식탁 차린 사람들

인간의 역사란, 미국의 도살장뿐만 아니라 과거에 이어서 현재에도 우리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만을 최상의 가치로 생각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이 거대한 흐름은 폭포의 물줄기와 같이 힘이 센 쪽으로 흘러 내려왔으며 거룩한 인간의 역사라고 자찬하고 있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시되던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 석가모니부처님의 탄생은 모두의 삶을 뒤돌아보게 하는 크나큰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2천 5백 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가르침은 『법구경』의 구절 속에 살아있음을 본다. 남의 고통이 나의 즐거움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그 결과는 서로에게 원한의 삶이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분명한 이유에서이다. 원한의 삶이 이어지면 자연히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원한의 축적은 지나친 자신의 욕망과 탐욕에 뿌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한을 줄이기 위해서는 먼저 탐욕을 줄여야 된다.

동양의 정신은 항상 물질의 가치보다는 정신의 가치를 우선순위에 놓고서 사상을 정립해 왔다. 석가모니의 무아(無我)와 자비, 공(空)과 연기, 노장(老莊)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나 현지우현(玄之又玄)의 사상, 그리고 공자의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다 물질보다는 정신의 가치에 우위를 둔 예이다.

그런데 20세기 이후에 이러한 동양정신의 가치의 형평(衡平)이 무너져버리고 물질의 가치가 우위를 점하는 현상이 극대화 되어버렸다. 생산성과 경제성을 논하는 물질적 가치에 치중하다보니 생명까지도 물질의 논리로 가치를 논하게 되어버렸다. 이는 위의 도살장과 같이 원한으로 얽매인 삶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인간도 동물도 함께 지옥의 고통이 이어질 뿐이다. 여기에 우리는 부처님의 『법구경』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면서 정신의 가치를 회복하려고 노력한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무명(無明)의 뿌리를 끊어내지 않는 한, 그 어두움의 그늘이 너무나 두텁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緣起)의 눈으로 모든 생명의 삶을 살펴봄으로써 나의 삶이 다른 생명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불교는 절대자를 맹신하도록 이끄는 종교가 아니다.

다른 생명과의 유기적인 삶의 관계성을 깨닫게 하는 연기의 지혜를 체득하게 하는 종교다. 이 지혜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루하루의 삶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나 자신의 하루의 삶을 떠나서 달리 자신을 가다듬을 터전이 없다는 진실을 먼저 알아차려야 한다. 하루의 참다운 삶을 통해서 얽혀있던 원한의 사슬로부터 스스로 끊고 일어서려는 자각이 필요하다.

불교는 삶의 유기적관계 깨닫는 종교

다른 생명의 희생 위에 우리의 삶이 이루어진다는 근원적인 통찰이 앞선다면 우리는 일체 생명에게 무한히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나의 삶 속에 생명과의 원한 관계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남의 고통위에 자신의 즐거움을 이룩한다면 원한의 사슬은 결코 끊어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의 음식문화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불과하지만, 모든 일상생활을 살펴보면 은혜를 베푸는 삶보다는 원한을 품게 하는 삶이 만연해 있음에 경악할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에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소욕(少欲知足)의 심성으로 서로 원한의 마음을 없애고 상생(相生)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일상의 삶을 모든 원한으로부터 벗어나 있도록 살피고 실천해야 한다. 제일 먼저 부처님 당시부터 수행의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여름결제 기간 동안만이라도 연기의 법으로 생명을 생각하고 일체에 감사하는 지혜를 먼저 기르도록 정진해 보자.    
 
본각 스님(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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