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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의 여운깊은 책일기] 1루피 동전에 담긴 비밀

기자명 법보신문

『슬럼독 밀리어네어』/비카스 스와루프 지음/강주헌 옮김/문학동네

뭄바이를 돌아다니다 잠시 들어간 커피전문점에는 여학생들 몇이 커피와 작은 케이크를 사먹으며 재잘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리창 밖에는 굶주린 기색의 소년이 가게 안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해맑게 재잘거리는 고운 소녀들과 남루하기 짝이 없는 소년 사이에 앉아서 유리창 안쪽이 진짜 인도인지, 유리창 바깥이 진짜 인도인지 정말로 궁금해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뭄바이의 세련된 커피전문점 바깥에 서 있던 남루한 소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 소설입니다.

12월25일 수녀원 정문 앞에 버려진 갓난아기에게는 ‘람 모하마드 토마스’라는 심난한 이름이 붙여집니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 흔적을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종교백화점 인도답게 붙여진 이름이지만 정작 소년의 인생에 이 종교들의 자비는 전혀 내려지지 않습니다. 그저 ‘두뇌를 쓸 수 없고 손발만을 사용해야 하는 천민’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할 운명입니다.

아시아 최대의 빈민굴인 뭄바이의 집단거주지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사건사고들이 벌어집니다. 가해자는 빈민굴에 사는 불우한 사람들이요, 피해자도 그곳에 사는 똑같이 불우한 사람들입니다. 옆집에서 아비가 제 딸을 성폭행한 사실을 알고 집주인에게 이 일을 알리지만 주인공에게 돌아온 대답은 이렇습니다.

“마누라를 때리고 딸을 강간하는 것은 뭄바이 집단주택 단지에서 흔히 있는 일이야. 그렇다고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우리 인도 사람은 주변의 고통과 불행을 보면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고매한 능력을 갖고 있단 말이다. 그러니까 뭄바이 사람답게 눈을 감고 귀를 막아라. 입도 다물고. 그럼 너도 나처럼 행복할 수 있을 게다.”

인도의 천민들에게 행운은 처음부터 불가능합니다. 어쩌면 이런 ‘진리’를 하루라도 빨리 깨닫고 불행에 순응하고 사는 것이 ‘행복’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토마스는 순응할 것인가, 거역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면 어느 점성술사가 쥐어준 1루피 동전을 던졌습니다.

“앞면이 나오면 내 결심대로 하는 거야!”라고 외치면서 말이지요. 인생은 토마스의 결심을 존중해주었습니다. 동전을 던질 때마다 앞면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소년은 혹독한 처지로 내몰릴 것이 빤해도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퀴즈쇼에 나가 억만장자의 꿈을 이룹니다. 전생에 얼마나 큰 복을 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 매번 동전의 앞면이 나온 것은 우연 치고도 참 대단한 우연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년의 행운은 전생도 1루피의 우연도 아니었습니다. 그 동전은 앞뒷면이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국가도 종교도 구제할 수 없는 빈민가 소년에게는 ‘나를 구할 것은 내 자신밖에 없다’는 내면의 외침만이 유일한 은총이라고 소설은 말해줍니다. 너무 현실감이 없고 억지스러운 결말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이 말밖에는 믿을 게 없는 것이 뭄바이 빈민들의 인생입니다. 

이미령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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