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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청심] 삶을 여행하는 법

기자명 법보신문

법련사 주지 보경 스님

1970년경에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작은 거인’이라는 영화가 있었다고 한다. 난 이 영화를 본 적은 없고 일본의 종교학자인 나카자와 신이치의 어느 글에서 읽었는데, 흥미로워서 기억하고 있다.

백인 남자아이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납치되어 자라게 되는데, 추장이 그를 키웠다. 이 추장이 어느 날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나는 죽는 꿈을 꾸었다. 나는 죽는다.” 이렇게 말한 그는 백인 아이만 홀로 데리고 초원으로 나가 대지 위에 드러누웠다. “자, 나는 이제부터 죽는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죽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누워 있었을까, 그가 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꿈이 맞지 않는 것 같구나!” 추장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마을을 향해 되돌아갔다.

대대로 부족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런 원주민들은 삶의 전 과정을 응시하려는 정신이 있는 듯하다. 거친 환경을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감사한 마음, 모든 것이 우주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다. 예를 들면, 초경(初經)을 맞은 여자아이는 외딴 곳의 움막에서 홀로 여러 날을 지내야한다. 이제 대지의 여인이 되었음을 깨달으라는 의미다. 남자 아이들의 성인식은 앞니를 부러트리거나 몸에 큰 상처를 내는 식이다.

여성들은 일생에 세 번의 연인을 둔다고 말한다. 태어나서는 아버지가 연인이고 결혼해서는 남편이, 늙어서는 아들이 그런 존재다. 이에 반해 남자들은 변화에 둔감하기 때문에 몸에 상처를 냄으로써 부족에 대한 책임과 공동체적 운명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여인은 아이를 낳을 때도 홀로 외딴곳에서 지내는데, 이 절대 침묵과 고독 속에서 엄마와 아기의 영혼은 소통한다.

그들은 영감이 뛰어나 대부분 자신의 죽음을 느끼기 때문에 앞의 영화처럼 홀로 초원에 드러누워 죽음을 맞을 수 있다. 물론 그 전에 부족에게 알려야 한다. 이 추장은 참 난감했을 것이다. 명색이 추장인데, 더구나 외부의 아이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죽음의 예시가 엉터리가 되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는 본인이 잘못 되었음을 시인하고 되돌아갔다. 생각해보면 한없이 간단한 일이다. 그들은 죽음에 이르러 말한다. “오늘은 죽기에 좋은 날이다.” 행여 ‘내가 잘못 생각했다’고 한들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티베트에서는 여행 중에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보는 관습이 있다고 들었다. 얼마나 떠나 왔는지 확인하는 전통이다. 흔히 뒤돌아보는 것을 유약하고 기백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인데, 삶은 본시 그렇게 부족한 것이라 자주 뒤돌아보지 못할 이유도 없다. 행복이 어떻게 오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작정 매달리는 것을 뜻하는 티베트어 ‘로톡(Lotok)’의 의미가 ‘거꾸로’인 것을 보면, “모르면, 백번 해도 모른다(百不知 百不會)”는 말이 틀리지 않는다.

여름장마가 훑고 간 화단이며 흙이 모이는 담 모퉁이를 따라 이런저런 풀들이 가느다랗게 파란 선을 그었다. 꽃이 우리가 원하는 곳에서 자란다면, 잡초는 자기들이 원하는 곳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그냥 제멋대로, 누가 좋아하건 말건 아랑곳 않는다. 그러니 어떤 손도 필요 없고, 태생이 미운털이 박혔으니 살 만큼 살면 그뿐, 굽히고 살 생각은 조금도 없다. 여름이라 시원한 게 그리웠던 걸까? 눈감으면 인도의 평원 가득 넘쳐나던 옥잠화가 뭉게구름처럼 머릿속에서 피어오른다.

법련사 주지 보경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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