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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청심] 이 사람

기자명 법보신문

거금도 금천선원장 일선 스님

도반 스님이 하안거 만행 길에서 찾아왔다. 섬에서는 특별히 대접할 것이 없으니 가장 귀한 선물은 파도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마침 태풍 모라꼿이 아직 여운을 남기고 있어 바다에는 파도가 성난 산짐승처럼 으르렁 거리고 활화산처럼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금방이라도 집어 삼킬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맨발로 포행을 하다가 적멸 속에서 한량없는 묘용을 일으키는 파도소리를 관하면서 물기 어린 풋풋한 몽돌로 돌탑을 쌓는다. 선방에서 첫 철을 함께 정진했던 인연이라서 초발심의 천진한 모습으로 돌아가 돌팔매질을 하며 한바탕 실력을 겨루고 나니 어느덧 어둠이 내리고 큰 비가 몰려오고 있다. 바다는 언제나 변화무쌍해서 좋지만 아직도 변함없이 선객으로 살아가고 있는 도반 스님의 모습은 어느덧 심지가 바로 서고 그윽한 수행의 연륜이 쌓여 있어 대견스럽고 의젓해 보인다.

그 동안 수행의 길목에서 방황할 때마다 정견을 바로 제시하여 주었고 더욱 실답게 정진을 하자고 경책을 해주니 참으로 고마운 도반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눈푸른 도반이 있었기에 이번 안거는 참으로 짬지게 보낸 것 같아서 가슴이 뿌듯하여 다시 한 번 발심을 일으킨다.

임제 스님은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여 지금 바로 눈앞에서 훤칠하게 밝아 역력히 듣고 있는 ‘이 사람’은 어디를 가나 걸림이 없고 시방법계를 꿰뚫어 삼계에 자유자재 하니 온갖 차별 경계에 들어가도 휘말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 사람은 본래 모양과 이름이 없고 느낌도 없으며 빛깔도 냄새도 없어서 마치 빈 거울과 같지만 나타날 때는 이 사람 아닌 것이 없어 마치 빈 거울이 일체 경계의 인연을 따라서 차별 없이 비추는 것과 같다. 하지만 온갖 차별의 대상이 지나가고 나면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처럼 언제나 담연하여 생사를 따르지 않아 무엇 하나 의지함이 없는 참사람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마음 밖에 마치 절대 신이 있어서 인간의 행과 불행을 주제하는 줄 알고 미혹 속에 헤매는 것은 인류가 오랜 무명 속에서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쌓아 올린 집단 무의식이다. 또한 수행하는 사람이 미세망념이 다하지 못하여 참으로 맑은 경계를 얻어서 이것을 성품으로 오인하여 영원불멸의 아트만처럼 지키고 있으면 외도에 떨어진 것이다.

한편 참으로 맑은 경계에 집착하면 더없이 안온하고 힘이 있어서 일어나는 일체 번뇌와 대상을 여기에 놓아버리면 바로 녹아지고 천하를 호령하여 무너지지 않을 것 같지만 이것 또한 미세한 맑은 마음을 성품으로 오인한 것이니 벗어나려면 끝까지 무심인 활구를 밀고 나가야 한다. 또한 무아라고 하여 내가 없다고 하니까 없다는 소견에 떨어져서 없다는 견해를 세우고 선사들이 붙여놓은 주인공이니 한 물건이라는 빈이름에 부질없이 시비를 일으켜 참으로 고요한 나와 우주의 본질마저 없다고 한다면 이것 또한 큰 병통인 것이다.

이 사람은 한 생각도 세우지 않으면 무한한 능력을 발휘하여 온갖 차별경계에 들어가도 절대로 휘말리지 않는다. 그 마음이 한결같아서 텅 비었기 때문에 무엇이나 할 수 있고 조화롭게 어울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젯밤 비바람에 그 동안 폭염을 가려주었던 파초 잎이 꺾이고 찢어져서 아직 남은 늦더위가 걱정이 된다. 하지만 철없이 속이 텅 비었기에 금방 힘차게 밀고 올라와서 시원한 파초선이 되어 남은 더위를 식혀 줄 것이다.

이 사람이야 말로 더위와 추위에 상관하지 않는 멋진 사람이다.

거금도 금천선원장 일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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