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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청심] 첫 만행의 기억

기자명 법보신문

법련사 주지 보경 스님

절집에는 ‘안거(安居)’가 있다.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온 수행의 제도다. 인도에는 여름에 우기(雨期)가 있어 이 기간의 석 달 동안 한 곳에 머무른 데서 시작되었다. ‘마음을 내려놓고 한 곳에 있는다’는 말쯤 되겠는데, 나는 몸을 한 곳에 두고 배겨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한국의 수행전통에서는 여름과 겨울에 석 달씩 안거를 하고 있다. “결제(結制)”라고도 한다. 이때는 산문출입을 엄격히 금한다. 마음 수련보다 진정 어려운 것은 몸을 닦는 것이다. 수련의 처음에는 생각대로 몸이 따라간다. 

그러나 점점 공부가 익어갈수록 의지와 상관없이 몸 자체의 흐름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몸이란 게 묘해서 생각을 가만 둬도 저 혼자서 아무 걸림이 없이 먹고 놀고, 천방지축이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다시는 유곽에 걸음을 않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하루는 말 등에서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그 유곽 앞이어서 말의 목을 베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이것을 ‘습기(習氣)’라 한다. 생각과 행동이 반복되다보면 습관이 된다. ‘업(業)’은 범어로는 ‘카르마’인데, ‘행위’를 뜻한다. 무심코 하는 말과 행동이 삶의 방향을 결정짓기 때문에 마음공부 하는 이들은 유념해야 한다.

한철이 끝나고 다음 철의 결제까지 석 달은 해제기간이다. 이 기간에 미뤘던 일도 보고 자유롭게 다니면서 산중에서 익히지 못한 갖가지 수행의 방편을 배우는 좋은 시간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래서 ‘만행(萬行)’이다. 우리 절 같은 도심 포교당은 거쳐 가는 스님들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와 인접한 태고종 총무원이 있는 법륜사의 현판에는 지금도 ‘대본산 금강산 유점사 경성 포교소’라 조그맣게 새겨져있다. 이렇게 역사는 남는다.

아무튼 교통이 없던 시절엔 더더욱 이런 공간이 필요하지 않았겠는가. 하루는 문득 출가 후로 처음 나섰던 만행이 생각났다. 당시 은사스님은 큰절에서 주지소임을 살고 계셨기 때문에 주지실 시자는 짬이 없었다. 긴 겨울 끝의 해제라서 바깥바람이라도 쐬고 싶었지만 “병아리가 돌아다니면 매가 채간다”며 은사스님은 어린 마음을 외면하셨다.

80년 초 어느 봄, 간신히 하루만 다녀오라는 허락을 받고, 지금 큰절의 강주로 계시는 일귀 스님과 함께 머물고 왔던 절이 전주 송광사다. 왜 그 절에 가게 되었는지는 도통 기억에 없고, 이때의 일만은 선연하게 남아있다. 저녁때가 되어 도착한 송광사는 불사중이어서 달리 처소가 없었던지 큰 방에 병풍을 이용해 몇 갈래로 세워 놓은 게 방 구실을 하고 있었다.

주지스님과 신도 두어 분이 주고받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잠이 들었고, 깨어보니 밖이 환하게 밝아있었다. 아침 공양을 하고 인사를 드렸다. 객비를 주셨다. 5천 원 권 한 장이었다. 봉투를 열어 본 건 아니고 미끈거리는 노랗고 얇은 봉투가 속을 보여줬기 때문에 알았던 거다. 당시 송광사 강원의 한 달 보시가 5천원이었다. 무엇에 이끌렸는지 난 바로 공양간으로 들어가 공양주보살을 찾아 객비 봉투를 손에 쥐어 드렸다.

전주 정도 밖에 못 간 것은 여비가 그밖에 없었던 까닭인데, 그런 내가 노(老) 보살께 선뜻 드렸던 것은 속가의 노모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노란 모조지 봉투 속의 보시가 너무나 고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진실로 소중한 것은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큰 사랑은 자신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보살의 정신을 깨달았던 것도 만행의 소득이었다. 한편, 철이 드는 건지 요즘은 구산노사의 이 말씀이 참 좋다.

“할 것 다하고 공부는 언제 한단 말이냐!”

법련사 주지 보경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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