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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의 초원 몽골을 가다] 3. 불교, 그 안타까운 찬란함

기자명 법보신문

적막한 초원 위 순백 사원만이 제국의 옛 영광 전해

 
몽골 최초 티베트 사원 에르덴조. 흰탑들이 호법신장처럼 둘러싼 이 사원(왼쪽 사진)에는 몽골불교의 위대한 선지식 쟘마바자르의 아버지 무덤이라 전해지는 흰탑이 있다.

바양고비 캠프 게르 안 엷어진 온기가 멀어져갔다. 대신 망망한 초원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이 이른 아침의 한기를 한 줌 떼어갔다. 곧 채비를 했다. 아침을 먹고 몽골의 옛 수도 하르허린으로 떠나야 했다. 어젯밤 몸을 의지한 게르를 등졌다. 간밤에 신세졌던 게르에 고마웠단 눈인사를 건넸다. 캠프를 운영하는 몽골인들과 야생동물로부터 밤새 캠프를 지킨 검은 개 한 마리가 배웅을 나왔다. 차가 일으키는 먼지 속으로 사라져가는 그네들의 실루엣에 손짓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꼬리를 흔들며 배웅하던 검은 개의 잔상이 유난히 오래 남았다.

눈이 또 충혈됐다. 미세먼지는 코끝까지 간질이고 재채기는 그칠 줄 몰랐다. 아침 일찍 나선 여정에 수난은 계속됐지만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툴툴거리는 마음을 달래주었다. 눈에 가득고인 눈물을 닦아내기를 수십 차례.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 남서쪽으로 370km에 이르러서야 오르혼 강 연안에 위치한 옛 수도 하르허린에 도착했다.

그 옛날 카라코롬이나 하르허롬이라 불렸던 하르허린. 광활한 제국의 옛 수도였던 이곳은 1235년 칭기스 칸의 아들 우구데 칸이 도시를 중심으로 성을 만든 후 두멩 암갈란트라는 궁궐을 도시 서남쪽에 세웠었다. 궁은 모두 64개의 기둥으로 이뤄졌고 높은 기둥은 강력한 왕권을 상징했다.

1253년 두멩 암갈란트에서 칭기스 칸의 손자를 만났던 프랑스 프란체스코회의 수사 루브룩은 당시의 하르허린을 이렇게 묘사했다.

“왕은 모든 종교를 평등하게 대하기에 도심에는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건물이 12곳에 있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각자의 신에게 예배한다. 서양과 동양 문화를 연결하는 이 도시가 세계 여러 나라의 정치와 문화, 경제, 무역 등의 중심지였다.”

한때 100여 법당에 천여 명 스님 거주

그러나 천하를 호령했던 몽골의 옛 수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몽골 최초 티베트 불교 사원 에르덴조에 발을 내디딘다는 사실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에르덴조 사원은 칭기스 칸의 스물 한 번 째 후손인 압테 칸의 주도로 1586년 첫 전각인 ‘조’를 시작으로 건립됐단다. 그러나 청나라의 침략으로 완전히 버려졌다.

이후 찬란했던 몽골 제국의 옛 궁궐 터에서 발견된 석주, 벽돌 등 다양한 건축자재를 사용해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불사가 계속돼 지금의 에르덴조 사원이 있게 된 것이다. 당시 100여 개의 법당과 300여 게르에 1000여 명의 스님이 거주하고 있었고 108명의 무용수가 있었으며, 매년 장엄한 종교의식이 열렸었다. 허나 지금은 1930년대 종교를 허락하지 않는 스탈린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맨 처음 지어진 세 개의 전각과 그 밖에 15개의 전각을 남기고 모두 쓸쓸한 먼지가 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귀를 솔깃하게 했던 사실은 건축물에 못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하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에르덴조 사원의 매력은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의 탑이었다. 파란 물감을 몽땅 뿌려놓은 듯한 하늘 아래 호법신장처럼 사원을 둘러싼 흰 탑들. 가이드 어기 씨의 말로는 사원 외벽 사방에는 각각 23개씩 92개와 네 모서리 밖으로 각각 2개씩 8개 그리고 사원 중앙의 흰 탑 6개와 전각 앞 2개를 합하면 모두 108개가 있다고.

벽에 천개의 불상이 안치돼있다고 해 천불전이라 불리는 전각 ‘조’를 먼저 참배했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35세 때의 석가모니 본존불이 순례자를 맞이했다. 좌우 협시불로는 서쪽에 건강을 지키는 불상, 동쪽은 아미타불이다.

삼존불 앞에는 부처님의 네 제자를 형상으로 만든 불상, 그리고 그 앞으로 다시 8개의 불상이 봉안돼 있다. 전각 입구 문 동쪽에는 절을 지켜주는 호신불과 서쪽에는 불법을 지키는 여인상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 섬뜩한 모습에 오금이 저렸다. 차마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모습이 너무 괴기스럽다며 팔에 돋은 닭살을 쓸었더니 사원 안내자가 빠른 몽골어로 설명했다. 말인 즉 이렇다.

원래 남성 불상 9개와 여성 불상 1개가 있었다. 부처님은 그들에게 악귀를 죽이라고 보냈지만 오히려 그들은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 하여 마지막에 한 여인만 남았는데 그녀는 악귀와 결혼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악귀가 방심한 틈을 타 죽였다. 그녀의 섬뜩함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녀는 악귀의 가죽을 노새 등에 덮은 후에 그 위에 자기가 앉고, 악귀와 자신의 자식을 죽여 입에 물고 돌아왔다. 전각에는 그 모습 그대로 형상화돼 있다.

불자이고 뭐고 급히 발길을 돌리는 것으로 잔인한 여인의 이야기를 애써 외면했다. 사원 중심으로 향했다. 그 곳에는 몽골 민족이 배출한 수많은 라마 가운데 가장 위대한 라마 중 한 명인 현자 쟘마바자르(1635~1723)의 아버지 무덤으로 알려진 흰 탑이 있다. 본명이 이쉬덜쥐인 쟘마바자르는 몽골 불교에서 벅뜨(티베트 불교의 수장)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받은 사람이다. 그는 1638년 티베트에서 온 스님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불교 성인(달라이 라마)으로 인정받아 쟘마바자르라 불리기 시작했다.

샤머니즘 흡수로 몽골불교 토대 마련

아무튼 이 탑에 아기를 어깨에 들쳐 멘 스님과 두 여인이 오체투지로 예를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 흰 탑 앞에서 온몸을 낮춘 그들의 마음에는 어떤 바람들이 담겨 있었을까. 그러나 몽골인들의 지극한 불심 한가운데는 불편한 진실이 도사리고 있었다. ‘몽골의 종교’의 저자 이평래 교수는 전통신앙인 샤머니즘의 특정 요소를 수용하고 이를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방법으로 화해를 모색하면서 불교가 몽골인들의 가슴에 자리했다고 분석했다.

원래 몽골인들은 영원한 하늘이자 이 세상을 만든 창조주 뭉케 텡그리(텡그리는 하늘 신을 일컫는다)를 믿는다. 여기에 티베트 불교는 뭉케 텡그리 신화에 불교를 주입해 변형시키는 일을 한다.

아주 먼 옛날,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고 오로지 물로만 뒤덮여 있었던 때. 호르무스타 텡그리는 가릉빈가를 보냈다. 가릉빈가는 깃털을 뽑아 둥지를 만들어 알을 낳고, 그 둥지 위에 내려앉은 먼지가 쌓여 차츰 흙이 생겨나 오늘날처럼 흙으로 뒤덮인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로 대체된다. 16세기 알탄 칸 시대 이후 갑자기 등장한 호르무스타 텡그리. 자연에 대한 몽골인들의 지극한 숭배와 경외심을 이용해 몽골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또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 칸 이후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원나라의 부활을 막기 위해 몽골인들의 불심을 이용했다. 티베트 불교를 보호하는 척 하며 큰아들을 제외한 모든 아들을 출가시키라는 법을 제정한 것이다. 한 때 남성의 30%가 스님이었다는 존경심도 모래알을 씹는 불편함 앞에 서먹서먹해졌다.

불교란 지역의 민간신앙을 받아들여 민중에게 오래 기간 전통종교로 자리잡았다는 교과서적인 해석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전통신앙이던 샤머니즘을 배척하려던 티베트 불교와 라마승들. 그네들은 결국 샤머니즘을 불교화해 몽골인들의 가슴을 정복했던 것이다.
 
최호승 기자 sshoutoo@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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