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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청심] 무심의 덕

기자명 법보신문

거금도 금천선원장 일선 스님

이른 아침 산에 올라 활짝 벙글어진 밤을 딴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보면 오늘처럼 형님과 둘이서 밤 서리를 나섰던 추억이 새롭다. 우선 양쪽 호주머니에 가득 채우고 나면 다음에는 보자기에 넣다가 산주한테 발각되는 날에는 도망을 치곤했다. 밤나무 아래에서 탱탱하게 여문 알밤을 하나, 둘, 줍노라니 지금까지 마음속에 지은 바 일체 견해가 사리지고 어느덧 천진한 동심으로 돌아간다.

황벽선사의 『완능록』에서는 다만 다니고 머물고 앉아 눕는 모든 시간에 무심함을 배우기만 하면 분별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으며 또한 머물러 집착할 바도 없다고 했다.

온종일 임운등등하여 떠오르는 기운대로 내맡겨두는 것이 마치 바보와 같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모른다 해도 일부러 알릴 필요가 없다. 마음이 마치 큰 바위덩어리 같아서 도무지 갈라진 틈이 없고 일체 법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으면 이때서야 비로소 상응할 바가 있다고 했다.

하늘이 청자 빛으로 본색을 드러내고 온갖 풀벌레들이 장엄한 합창을 하는 다시없는 귀한 시절이다. 가을이 오면 사람들은 저마다 시인이 되고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심정이 일어난다. 지난 시절을 돌이켜 보면 왠지 모르게 나를 드러내려고 했으며 남이 억울한 소리를 하면 선지식인 줄 모르고 밝히려고 했으니 참으로 부끄럽기만 하다.

무심에는 일체 견해가 서지 못하여 한 법도 세울 수 없다고 했는데 조그만 지해로 왜 그렇게 많은 상을 냈는지 생각하면 업력이 무척 두터운 사람인 것 같다. 하지만 끝까지 일대사를 밝히고야 말겠다는 신심은 변함이 없어 세월이 가면 갈수록 아는 것은 사라지고 점점 모르는 것이 드러나니 업력은 무너지고 날마다 한가로움이 깊어만 간다.

참으로 그윽한 모름의 덕은 일체 양변을 세우지 않아 더없이 한가롭지만 인연을 만나면 가을바람이 만물을 아무런 차별 없이 영글게 하여 그윽한 향기로 다가오듯이 그저 넉넉하기만 하다. 그래서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조사가 한 법도 얻은 바가 없다고 했지만 저마다 마음껏 풍류를 누렸으니 이것은 깨달은 사람이나 범부들이 차별 없이 가지고 있어 본래 평등한 무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두두물물이 무심의 나툼이어서 그대로 안락을 누리지만 범부는 만나는 대상마다 차별심을 일으켜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제사 철이 들어 일체 견해가 사라지고 점점 모름의 덕이 일어나니 올 가을엔 더없이 풍요로울 것만 같다.

신종플루의 영향으로 절마다 크고 작은 행사들이 취소되거나 연기되었다고 한다. 근래에 선불교를 중흥시켰던 경허선사는 행각을 하다가 날이 저물어 하룻밤 쉬어가려고 처마 밑을 찾아갔다. 하지만 전염병이 돌아 사람이 죽어나는 처지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크게 발심하여 일체 견해를 벗어버려 대도를 성취하였다.

수행자들에게는 언제나 호시절이다. 저마다 냉정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여 큰 난리가 닥쳐와도 마침 좋은 때가 되어 이웃들의 아픔을 대신할 수 있도록 더욱 정진을 해야 할 것이다.

일대사를 끝까지 요달하지 못하여 널리 무심의 덕을 베풀지 못하고 지금 인연을 달리 한다면 참으로 억울할 것만 같다. 그러므로 죽음은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예고 없이 찾아온다고 했으니 더욱 발심하여 촌음을 아껴서 정진해야 할 것이다.

도토리가 산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에 바다 밑에서는 해맑은 바람이 일어난다.

거금도 금천선원장 일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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