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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한국불교 최초] 60. 노인복지시설

기자명 법보신문

1952년 설립 부산 정화양로원이 현존 최고

법화사 주지 비구니 묘선 스님이 법인 설립
사찰에 시설 마련 노인·아동 80여 명 수용

 
현존 불교노인복지시설 중 가장 오래된 정화양로원의 현재 모습.

서울시 인구의 10%가 65세 이상 노인이라는 최근 통계자료에서 보듯, 고령화를 넘어 초고령 사회로 향하는 우리 사회에서 노인복지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화두로 등장한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이같은 노인복지문제는 아이러니 하게도 국가의 정책적 해결에 앞서 종교계가 먼저 문제 해결에 나서왔다. 특히 불교계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기근이나 재해가 닥치면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을 구휼하는데 앞장서는 등 사회복지 활동에 있어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뿐만아니라 전염병이 창궐할 때면 의약품을 만들어 치료했고, 보호해야 할 어린이나 노인들을 사찰에서 생활하게 하는 등의 활동도 오래 전부터 해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사찰 토지가 몰수되고 대중들의 출입이 제한을 받는가 하면 출가가 금지되는 등의 억불정책으로 인해 불교계 자체가 위축되면서 이전처럼 왕성한 대민 구휼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개화기, 한일합방, 미군정, 대한민국 정부수립 등의 근현대사 속에서도 서구 종교단체의 활동에 대응할만한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구경만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 땅에 발을 디딘 기독교계가 자국의 지원을 받으며 체계적인 복지활동에 나서면서 선교의 폭을 넓히는 동안 불교계의 활동은 예전처럼 절에서 어린이나 노인들을 돌보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불교계 사회복지활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시대 불교계에서 발행한 잡지 등에 따르면 아동, 청소년, 노인을 상대로 한 복지활동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 가운데 널리 알려진 구호사업 중 하나가 1925년 한강 대홍수 때 봉은사 나청호 스님이 배 5척을 임대해 708명의 생명을 구한 일이다. 또 쌀을 비롯해 의복과 수해의연금 등을 지원했고 월정사, 심원사, 경남 진주포교당 등 지방 곳곳에서도 빈민구제와 구호활동이 이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불교계 빈민구호사업을 대표하는 불교자제원이 있어 그 명성을 크게 떨치기도 했다. 당시 기독교계는 “조선불교의 여러 사업은 논하기에 부족할 정도”라고 깎아 내리면서도 “경성불교자제원은 비교적 유명한 사업을 경영하고 있어 우리가 깊이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라고 그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있을 정도였다. 경성불교자제원은 당시 넘쳐나는 행려병자들을 구제하는데 앞장서는 등의 활동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록상 최초 시설은 경성양로원

불교계에서 시설을 갖추고 복지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불교계의 첫 번째 노인복지시설은 1925년 경성 불교구제원에서 설립한 경성양로원이다. 이 시설은 이정관심이라는 법명만 알려진 한 불자가 사재 3만원을 조성해 설립하게 됐고, 이것이 곧 현대적 불교노인복지사업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설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구체적인 규모나 활동을 알기 어렵다.

일제시대에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못했던 불교노인복지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1952년 부산 정화양로원을 시작으로 1957년 자연동산 제주양로원, 1961년 대구 화성양로원, 1963년 부산 영락양로원 등이 잇따라 문을 열어 불교노인복지시설로 그 역할을 다했다.

이 가운데 1952년 설립된 부산 정화양로원은 해방 이후 불교계에서 설립한 최초의 노인복지시설이자, 현재까지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불교노인복지 시설이기도 하다. 정화양로원은 당시 부산 영도 법화사의 주지였던 비구니 묘선 스님이 설립했다. 그러나 정화양로원은 설립 초기부터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묘선 스님이 전쟁으로 어지러운 상황에서 권력 실세들과의 친분을 과시하던 K씨를 믿고 법인인가를 받아 양로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시설 운영을 그에게 맡겼으나, 그가 스님도 모르게 서류를 바꿔 자신을 정화양로원의 이사장 겸 원장으로 만들어 놓은 데 이어 시설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도망갈 계책까지 꾸몄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대출을 받기 직전에 스님이 그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정화양로원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었으나, 스님이 시설 운영에 있어서 전문성을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당장의 운영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스님은 또 이미 세속의 나이로 70을 넘긴 때여서 요양원 시설이나 수용자들을 관리하는 것조차 여의치 못했다.

그때 묘선 스님과 인연을 맺은 사람이 바로 이상훈 씨다. 이 씨는 당시 정화양로원에서 해임된 이후 묘선 스님을 협박해 돈을 받아냈던 K씨가 새롭게 설립해 운영하던 시설에서 근무하던 중 K씨의 부정부패를 참지 못해 갈등을 빚다가 결국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하려고 계획 중이었다. 그런 이 씨를 묘선 스님이 삼고초려로 영입했던 것.

불심이 돈독한 불자였던 이 씨는 그때부터 묘선 스님과 함께 정화양로원 운영에 나섰다. 그러나 너나 할 것 없이 하루 먹거리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어렵기만 하던 시절이어서 정화양로원의 사정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밥은 새까만 보리밥에 하루 한끼는 강냉이와 우유가루를 섞은 죽을 먹어야 했고, 반찬은 소금이 잔뜩 들어간 김치와 법화사 신도들이 거두어온 된장에 시래기류를 넣어 국을 끓여 먹는 게 다였다.

매달 경상남도 사회과에서 생계비를 받았으나 당시에는 고아원을 함께 운영하고 있어서 어린이들의 학비, 교통비, 전기세를 충당하기에도 부족한 액수였다. 결국 노인과 어린이 80명이 생활하는 정화양로원은 곡식의 일부라도 자급하기 위해 법인이 소유한 10000여 평의 땅 중 4000 평의 밭에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법화사 샘물을 팔아 보리쌀을 구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겨우 겨우 수용자들의 먹을거리를 해결 할 수 있었다. 이어 콩나물 공장을 운영하면서 형편이 조금 나아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먹을거리는 법화사 스님들의 양식과 식수판매대금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여기에 삼보정재가 사찰 운영과 불사에 쓰이지 않고 상당 부분 양로원 운영에 사용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신도들의 부정적인 목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정화양로원은 이상훈 씨가 유지

 
정화양로원 내에 설치된 법당.

“양로원과 고아원이 경내에 있어 절이 더러울 뿐만 아니라 신성하지가 못하다”는 등의 말로 자신들의 뜻을 표출하던 불자들은 서서히 절을 떠났고, 결국 5년만에 부처님오신날 법당에 달던 등이 3000개에서 500개로 줄어들기까지 했다. 양로원 운영의 근간이 되는 사찰의 신도들이 이처럼 부정적 모습을 보이자 고심 끝에 시설을 사찰 경내에서 200m 떨어진 곳으로 옮겨서 짓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묘선 스님은 양로원을 보다 안정적이고 장기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스님은 자신의 사후에도 시설이 다른 종교로 넘어가지 않고 불교 이름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속가 자손들까지 불러 모아놓은 자리에서 이상훈 씨에게 원장 직함을 이관했다. 이상훈 씨는 이후 양계장을 운영하는 등 가축을 사육하고 밭을 개간해 배추, 무 등을 수확함으로써 시설운영에 있어서의 경제적 어려움을 서서히 해소해갔다.

정화양로원은 이후 1965년 금정구 장전동으로 이전하면서 노인복지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아동시설을 폐쇄했고, 1975년 다시 북구 화명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 2002년에 정화노인요양원을 신축, 다음해인 2003년에 개원했으며 2005년에는 양로원도 개축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정화양로원은 이상훈 씨의 딸 이춘화 씨가 원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으며 60여명의 노인들이 생활하고 있다.

불교계가 정화양로원 등 노인복지시설의 문을 열기 시작할 무렵 외국원조단체들은 국내 시설에 많은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 선교 차원에서 지원사업이 진행됐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을 따르지 않으면 지원 받는 것이 어려웠다. 때문에 불교계 시설은 정화양로원처럼 어려운 여건에서 자활의 길을 찾아야만 했었다.

이후 1970년대 말까지도 불교계에서 설립하거나 운영한 노인복지시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진각종이 1969년 청도기로원을 설립한데 이어 보문종이 1972년 시자원을 설립해 종단차원에서 시설을 운영했다. 그리고 1972년에 법수선원에서 수용시설을 설립했고, 1975년에는 원주 성불원이 원주시립복지원을 위탁운영하기 시작했다. 또 1977년 울산 유란양로원, 1979년 군산 수심양로원 등이 문을 열어 불교 노인복지시설로 운영됐다.

그러나 이들 시설은 전문적인 시설환경이나 인력을 갖추지 못해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법적 기준을 충족하지 못함에 따라 운영예산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아 문을 닫는 일이 잦았다.

현재 불교노인복지시설은 154개

불교계 노인복지는 이후 1980년대까지도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에 불과했으나,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법보신문이 2009년 10월 2일 제19회 세계노인의날을 앞두고 불교노인복지시설 현황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991년 이전까지 20여 곳에 불과하던 노인복지시설이 2007년 말 기준으로 154곳으로 늘어나 있었다.

노인복지 시설별로는 서울특별시 노인복지의 허브로 성장한 서울노인복지센터를 비롯해 노인종합복지관만 41곳이었고, 제주양로원·화성전문요양원 등 장기요양시설이 70여 곳이었다. 또 진각치매단기보호센터 등 단기보호시설도 20 곳이나 운영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자리 창출, 호스피스, 상담 등 다양한 노인복지 분야에 참여하며 활동영역도 확장해 가고 있다.

특히 연꽃마을 안성노인종합복지타운과 인덕원 인덕노인종합복지타운은 노인복지의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손꼽히고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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