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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묵 스님의 풍경소리]

기자명 법보신문

중 물 들인다는 건 본래 자리로 돌이키는 것
가을 단풍보며 시비·오욕 물든 마음 비우길

언젠가 단풍을 보면서 중물들이기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단풍이 고운 빛을 띠는 것은 새로이 빛깔을 만들어 내서가 아니라 잎에서 푸른 색소가 감소하기 때문인 것처럼 중물 들이는 것 또한 이와 같겠구나 싶었다. 십칠팔년 전, 계를 받고 그저 젊은 혈기로 포교하러 나서겠다고 하자 은사 스님께서 만류하시면서 포교가 시급하긴 하지만 대중 생활을 통해 장판 때를 묻히며 중물을 들이고 해도 늦지 않다 하시며 큰절에 있는 강원으로 보내실 때는 중물 들인다는 것을 새롭게 무엇을 배워 채워 가는 것만으로 알았었다.

그래서 하판일 때는 계행을 잘 지키고 사미율의와 초심에 나오는 말씀 그리고 어른 스님들과 강원 상판 스님들이 일러주는 말씀에 따라 여러 가지 습의를 익히고 그에 따라 몸가짐 하는 것만을 중물 들이는 것으로 알았다. 그리고 딴에는 그렇게 해보려고 열심히 노력도 했었다. 그리고 스스로 중물 잘 들이고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강원 대교반 특강 시간에 무비 스님께서 “중물을 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때가 되면 중물을 빼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때는 이치가 그렇겠거니 하고 그리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나의 중물들이기에 문제가 있구나 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중물 들인다는 것은 진짜 중물 들이는 것이 아니라 속물을 빼내기 위한 방편일 뿐이고, 참으로 중물을 들인다는 것은 또 다른 생활 습성으로 자신을 길들여 색을 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찌든 속물을 빼내 아무런 물도 들어있지 않은 소백(素白)한 본래의 자리로 돌이키는 것이라고 말이다.

때로 절에서 오래 사신 분들 중에 겉으로는 반듯하게 보이지만 실생활에서는 수행하지 않은 이들보다도 더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이며 필요 이상으로 까탈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분들을 어쩌다 간혹 보게 된다. 계행이 희미해진 세태이기에 틀에 짜여진듯한 위의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귀함을 받긴 하지만 용심(用心)이 이러한 분들을 대할 때면 좀 답답해지고 일반적인 중물에만 지나치게 매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절 집에 오래 다니고 큰스님들을 많이 친견한 신도분들 중 자기 반열을 자기와 인연 있는 큰스님과 나란히 하고 젊은 스님들을 하시하는 경우나, 불교를 좀 배웠다는 분들이 입에 발린 지식을 내세워 체계적인 이론이나 설법에 좀 부족하다싶은 스님을 보면 무시하는 모습을 띠는 것을 종종 본다. 이런 모두는 물들일 줄 만 알고 그 물조차도 빼야 되는 물인 줄을 모르거나, 또는 그 물을 통해 또 다른 빛깔을 더 칠해서 남다르다 싶은 자신의 모습을 빗어내고 그것으로 자기 삶의 존재 실현으로 보지 않나 싶다.

법주사에 살 적 선방에 80 안팎의 노구를 이끄시고 정진하시는 노스님이 계셨다. 노스님께서는 그 연세에도 결제 때는 대중과 같이 정진하시고 산철에는 조석 예불에 꼬박 꼬박 참석하셨다. 그리고 예불이 끝나면 관음전 미륵전으로 가셔서 불보살님의 명호를 찾으시고 내세에도 이생에서와 같이 또한 열심히 정진할 수 있기를 발원 하셨다.

젊은 학인들을 보시면 친 손주를 대하듯 하시면서도 결코 소홀히 대하지 않으셨다. 억지를 쓰거나 꾸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절로 흘러나오는 그 모습에서 진짜 중물 든 모습이란 저런 것 이겠구나 했고 어떤 단풍이나 열매보다도 아름답고 귀한 것임을 깊숙이 느꼈었다.

이 가을, 그러한 어른 스님들의 모습을 되새기고 서럽도록 곱고 때로는 숙연하게 펼쳐진 단풍을 보며 밖으로만 치닫던 마음을 갈무리해 들이고, 시비와 오욕에 물든 마음을 비워냄으로서 본래 고운 자리를 피워내는 중물을 들였으면 한다.

정묵 스님 manib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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