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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청심] 성북동 만추

기자명 법보신문

“이번 주말, 비가 오고나면 초겨울 날씨를 보이겠습니다.”

방송에서는 11월로 넘어가는 마지막의 주초부터 주말의 비를 예고하고 있었다. 비는 정말로 내렸다. 빗속에 나서는 일은 항상 머리 무겁다. 풀 먹인 옷에 비가 들치고 나면 그 부분에 얼룩이 지면서 구김이 앉기 마련이어서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이날은 어른스님 심부름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우중이라도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다녀와야 했다.

삼청 터널을 지나 가파른 길을 내려서는 지점에 위치한 나무들 속에 둘러 쌓여있는 낡은 이층 양옥 건물이 이 미술관이다. 전형필(1906~62)선생이 1929년부터 우리나라 전적·서화·도자기·불상 등의 미술품 및 국학자료를 수집하여, 1936년 지금의 미술관 건물인 보화각을 지어 보관해왔고, 1966년 이 수집품을 바탕으로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부설 미술관으로 발족했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시는 매년 봄·가을에 2주씩만 이뤄진다. 찾아 뵐 분은 최 완수 선생. 40여 년을 이곳에 머무시며 겸재 정선(1676~1759)을 비롯한 조선의 예술세계뿐만 아니라 불교 조형예술에도 남다른 공부를 쌓으신 분이다. 특히나 우리에게는 은사스님과 함께 송광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의 불상모시고 또 감수해 오신 인연이 있으셔서 가끔 찾아뵐 일이 있다. 이날의 인사도 마찬가지였다.

미술관에 들어서자 우중임에도 건물 입구부터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방문을 알리고 잠시 전시를 둘러보는데, 이날따라 가을비가 자아내는 음산한 분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림의 운필은 물론이고 종이의 질감까지 피부로 느껴졌다. 내 시선이 머물렀던 작품은 심전 안중식(1861~1919)이 1904년에 그린 ‘환희포대’작품으로 그림보다도 화제(畵題)가 좋았다.

길을 가도 포대요/ 앉아 있어도 포대라/ 포대를 내려놓는다 해도/ 무엇이 자재로우랴.
(行也布袋, 坐也布袋, 放下布袋, 何所自在)

포대화상(?~916)은 중국의 승려인데 이름은 계차이고 명주 봉화현 사람이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에 몸집이 뚱뚱하고 커다란 배는 늘어진 모습이다. 웃음은 행운, 불룩한 배는 부의 상징으로 여겨져 동아시아권에서는 달마대사와 함께 민간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는 길거리의 성자였다. 어디든 머물고 탁발을 하며 사람들에게 길흉화복과 날씨를 일러주곤 했는데, 맞지 않는 게 없었다. 특히 그가 지팡이 끝에 매달고 다닌 포대에는 무엇이든 얻어 담고, 누구에게든 원하는 것을 꺼내 주었던 보물 창고였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도 ‘포대’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건 한결 같을 수 있으면 그는 도인이다. 몸 따로 마음 따로 정신 놓고 살아가는 이는 이 말을 돌아보라. 『서호유람지』에 위의 제시(提示)가 나오는데, ‘何所’는 ‘多少’의 오식(誤識)으로 보는데, 난 ‘何所’의 의미가 더 좋다. 생각해보라. ‘포대’라는 무차별의 사랑이 담긴 자루는 화상의 숙명이다. 포대를 저버려서는 화상의 존재 의미도 없어진다. 그러니 자루를 내려놓음으로서 얻는 다소간의 가벼움이 문제가 아니라 포대를 놓는다 해서 화상의 삶에 무슨 변화가 있겠느냐는, 부정을 통한 대 긍정의 시선이 더 쾌활하지 않는가?

형형한 눈빛. ‘좁은 길을 다투지 않고’ 살아온 선비정신의 표상 같은 일생이 읽혀지는 고희를 바라보는 선생이 따라주는 차 한 잔을 마시는 사이에 저간의 여러 말씀을 올리고 돌아서도록, 빗줄기는 바쁠 것도 없이 가을을 긋고 있었다.

우린 바빠도 너무 바쁜 거다, 틀림없이.

법련사 주지 보경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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