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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지성] 23. 하인리히 짐머-심재관 금강대 HK교수

기자명 법보신문

순환적 시간관에 주목한 낭만주의 인도학자

인도 미술·신화 연구 통해 철학 사유
자아·무한에 대한 동양적 통찰 주목
만담-신화는 진리와 가르침의 매개체

 
하인리히 짐머는 독일의 낭만주의 인도학을 마지막으로 이끌었던 선장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인도는 문헌과 사진 속에서 그려진 ‘상상의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유유자적한 인도답사를 생각하기에 그의 인생은 너무 피곤했던 것처럼 보인다.

20세기 초까지도 유럽의 인도학이 하나의 오리엔탈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것은 인간의 영혼을 감격케 하고 차원 높은 정신의 고산지대로 이끌어주는 강력한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낭만주의의 이국취향도 한 몫하고 있지만, 이러한 문예 운동의 밑바닥에는 인간의 영혼과 정신적인 것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무엇보다 컸다. 유럽의 낭만주의적 인도학에 많은 지식인이 열광했던 것은 이러한 가능성의 문으로서 인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초기의 낭만적인 인도고전학자들 가운데는 대부분 인도를 여행한 적이 없었던 사람들도 많으며 이러한 점에서 하인리치 짐머(Heinrich Zimmer, 1890~1943)도 마찬가지였다. 일면 그의 정신적이고 초월적인 인도는 문헌과 사진 속에서 그려진 ‘상상의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유유자적한 인도답사를 생각하기에 그의 인생은 너무 피곤했던 것처럼 보인다.

칼융의 심리학에 큰 영향 받아

그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전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예술사와 독일어에 대한 연구로 학문의 여정을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은 인도철학을 시작하면서 그대로 반영된다. 베를린에서 산스크리트와 인도학을 연구한 후 그는 하이델베르크의 교수로 취임(1924년)하는데, 이때부터 그는 칼 융과 알프레드 베버, 칼 야스퍼스 등과 교류를 지속했다.

특히 칼 융의 심리학은 그의 철학과 신화나 미술해석에 매우 깊이 있고 항구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경향은 신화해설가로 유명해진 미국인 제자 조셉 캠벨에게도 계속된다.
하이델베르크 교수시절, 유대인 제자를 아내(크리스티안네 폰 호프만슈탈)로 맞은 이유로 짐머는 나치의 간섭을 받게 되고 그 이후로 교수직에서 박탈된다.

그가 영국을 거쳐 다시 미국에 정착한 것이 1940년. 1940년에서 1943년까지의 미국생활은 콜롬비아대학에서 이루어진 4년여 간의 강의가 대부분인데, 그것도 폐렴으로 인해 52세의 짧은 나이로 사망한다. 사실 그의 학문적 경력은 대부분 미국이 아니라 하이델베르크에서 축적된 것이고 가장 왕성했던 시기도 그 때였다.

학문적 경향으로 볼 때 하인리히 짐머는 독일의 낭만주의 인도학을 마지막으로 이끌었던 선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주요 연구분야인 인도미술과 신화, 철학의 제분야에 대한 연구 속에는 자아와 영원, 무한한 시간에 대한 통찰력 있는 해석이 유려하게 흐른다. 또한 미술과 신화, 철학의 영역들은 완전히 분리된 연구주제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차적으로 상보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짐머의 업적에 대해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대부분은 캠벨의 손을 거쳐 편집된 영어서적이 전부라고 할 수 있으며, 제대로 된 저서목록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독일에서는 아직도 그의 자료에 대해서 발굴중이다.(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미하엘 악셀 교수가 최근 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를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저술은 캠벨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프린스턴대학 볼링엔 시리즈의 일련의 저술들인데, 대체로 요가나 신화, 인도예술에 대한 책들이다. 조셉 캠벨이 볼링엔 시리즈의 편집을 맡게 된 것은 칼 융과 가까이 했던 짐머의 인연 때문이었다. 조셉 캠벨은 그의 콜럼비아대 제자 가운데 가장 넓은 대중적 반향과 인기를 얻었던 학생 가운데 한명이었다.

사실 짐머의 대중적인 인기나 사상적 평가는 캠벨이 짐머 사후에 그의 원고를 편집하거나 번역해 출판한 네 권의 책(『인도 성상 속에 나타난 예술 형태와 요가』, 『인도 미술과 문명 속의 신화와 상징들』, 『인도의 철학들』, 『인도 아시아의 예술』 등)을 통해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캠벨은 사실 짐머를 아카데미의 관 속에서 끄집어내서 대중의 마이크 앞에 세운 장본인이다. 아마 캠벨이 없었다면 짐머는 소수의 학자들만이 알고 있는 그런 학자로 남았을 것이다.

하인리히 짐머를 세상에 알린 것은 캠벨이 편집한 그 네 편의 대표적 저술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저술들은 그의 미술과 신화, 철학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지만, 이 책들 속에서 유달리 돋보이는 것은 인도의 시간관에 대한 그의 관심이다. 이는 학문적 장르를 넘어서 공히 나타나고 있다.

인도의 무한회귀적 시간관에 대한 애정은 그의 『인도 미술과 문명 속에 나타난 신화와 상징들』에 처음부터 노출되고 있다.(물론 이것은 편집자 캠벨의 취향일 수 있다). 이 책은 인드라의 오만함을 일깨우기 위해서 비슈누가 동자로 변해 우주 속에 또다른 우주가 내포된 중층적 우주와 그 속에 전개되는 시간의 상대적 덧없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신화와 도상의 해석에 나타나는 이러한 개인적 취향은 두드러지는데 예를 들면, 우다야기리에 표현된 대지의 여신을 구출하는 바라하 화신 조각을 기술하면서, 그는 뿌라나에 적힌 다음 구절에 주목한다. “매번 나는 너를 이와 같이 인도하였느니라….” 이는 대지의 창조(땅의 여신의 구출)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매번 우주의 탄생시기에 반복되는 것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창조는 순환적인 인도의 시간관(kalavada) 속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행위인 셈이다.

이러한 신화와 도상의 해석으로부터, 그는 불교와 힌두교 등에 나타나는 동양의 시간의식이 서양과 동양을 가르는 중요한 척도라는 것을 강조한다.
인도의 이 영원하고 회귀적인 시간관은 이제 최근의 인도연구자들에게 식상한 주제가 되어버렸지만 이것을 사회 속에서 그리고 개인들 속에서, 제도와 문화 속에서 어떻게 내재화할 것인가는 그닥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현대 인도학자들에게 인도는 소비만 될 뿐 더 이상 (개인이나 사회에)환원되지 않는 고엔트로피 학문소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현대의 인도학자들은 이러한 낭만주의적이고 심지어 신비적인 태도가 인도학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지만, 이러한 것이 연구자나 소비자의 심층 속에서 망각될 때 인도학이나 불교학이 더없이 건조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시간의식이 동서 가르는 척도

짐머의 학문적 편력과 경향을 살필 때 그의 글들은 미술과 신화 그리고 사상과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미술과 신화와 같은 상징적 그릇들은 거기에 담겨있는 사상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특이한데, 그는 종교적 관념이나 철학을 오히려 미술이나 신화적 표현을 해석해내는데 곧잘 동원한다. 이러한 관점은 그 자신이 찬양했던 인도미술사가 쿠마라스와미의 관념적 해석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는 신화와 철학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도세계에서 민담이나 신화는 철학자들의 진리와 가르침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이러한 상징적 형식 속에서 철학이 대중화되기 위해서 그 철학적 의미가 희석되어서는 안 된다. 생기 있고 완벽한 회화적 묘사만이 일말의 손상 없이 그 사상들을 사람들의 감각 속에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짐머의 신화와 미술을 바라보는 관점은, 신화와 미술이 사상을 전달하는 대신 매개수단이나 중간자로서의 가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만인을 위해 더 효용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학문의 각 분야를 아우르는 이러한 짐머의 통섭의 자세로부터 우리는 미시적 연구분야에 매몰되는 전문성의 한계에서 잠시의 여유와 방법적 전회의 계기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창조 무한히 반복되는 행위

최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인도철학과 지성사’ 교수직이 인도와 독일의 협정 하에 만들어졌고 그 자리의 명칭을 ‘하인리히 짐머 체어’로 했다는 흥미로운 소식을 접했다.
오늘날 학자들은 짐머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도를 읽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영감을 자극하는 원천임에 틀림없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하인리히 짐머 체어’를 계기로 과거의 영예를 되찾기를 새삼 기대한다. 
 
심재관 금강대 HK연구교수


심재관 교수는

현재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동국대, 강릉대, 상지대 등에서 강의했다. 동국대에서 고대 인도의 의례와 신화에 대한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산스크리트와 고대 인도신화 텍스트인 ‘뿌라나’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인도의 건축과 미술에도 관심을 확장하고 있으며, 2006년부터 파키스탄 판잡대학의 사본연구에도 참여하고 있다.

저서 및 공저로는 『세계의 창조신화』(동방미디어), 『세계의 영웅신화』(동방미디어), 『인도의 전투신 스칸다의 탄생신화』, 『탈식민시대 우리의 불교학』(책세상), 『힌두사원(근간)』(대숲바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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