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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사, 초월 스님․독립운동 사료 조명 세미나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09.12.04 13:22
  • 수정 2011.08.13 10:52
  • 댓글 0

“밤하늘 별은 저렇게 총총한데
우리는 언제 독립을 되찾을까”

자금조달․의용승군 조직
모진 고문 견디다 순국
만해․용성 버금가는 열사

지난 5월 26일 오전 8시50분 서울 은평구 진관사. 이곳 칠성각을 해체 복원하던 중 벽 속에서 낡은 보따리 하나가 발견됐다. 그리고 얼마 후 이 보따리에 온통 세간의 관심이 모아졌다. 보자기로 사용된 태극기 1점을 비롯해 신대한신문 3점, 독립신문 4점, 조선독립신문 5점, 자유신종보 3점, 경고문 1점 등 총 6종 17점 등 귀중한 독립운동 자료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관사(주지 계호)가 12월 3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개최한 학술세미나는 지난 5월말 발견된 독립운동 자료의 가치와 의의를 비롯해 진관사와 한국독립운동의 연관성에 대해 심층적인 논의를 하는 자리였다.

 

이날 학술세미나는 역사학계 원로인 신용하 이화여대 석좌교수와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가 이번 자료의 역사적·문화재적 가치를 평가하는 기조발제로 시작됐다. 이어 김광식 동국대 연구교수는 독립운동 자료를 숨긴 인물로 알려진 초월 스님 조명을,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진관사 태극기를 다각적으로 고찰했다. 또 김주현 경북대 국문과 교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주필로 활동한 ‘신대한신문’과 그의 민족독립운동에 대해, 한상도 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상하이지역 독립운동세력이 발간한 것으로 추정되는 ‘자유신종보’의 간행과 독립운동의 동향에 대해 각각 조명했다.

 

그 결과 진관사 태극기는 1919년 제작돼 사용된 것으로 4괘 중 ‘리’와 ‘감’ 두 곳의 위치가 바뀌어 있고 태극의 모양도 지금보다 굴곡져 있는 초기 양식으로 덧붙임식 제작방식임이 확인됐다. 특히 이 시기 제작된 태극기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태극기 연구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또 ‘신대한’ ‘독립신문’ ‘자유신종보’도 단재의 새로운 작품을 싣고 있다는 점과 함께 당시 불교계와 단재와의 관계, 국내외 독립운동의 동향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라는데 학자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이번 세미나의 가장 큰 성과는 초월(白初月, 1878~1944) 스님이라는 위대한 독립운동가를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초월 스님은 만해, 용성 스님에 버금갈 정도로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고승이었다. 김광식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초월 스님은 14세에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해 25세 때 선원 조실로 추대될 정도로 선사로 인정받았다. 범어사 강원에 주석할 때는 ‘성도기(成道記)’를 작성하고 중앙학림(동국대 전신) 강사로 내정될 정도로 뛰어난 강백이기도 했다.

 

그러나 초월 스님은 1910년대 후반 불교가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지 않다고 개탄하면서 한국민단본부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불교계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스님은 진관사를 거점으로 임시정부에 보낼 군자금으로 2000원을 모금하는 등 독립군 지원에 나섰다. 당시 쌀 한 가마가 4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다. 초월 스님은 혁신공보 발행 및 스님들을 규합해 의용승군을 조직하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며 조선민중들의 독립운동을 고취시켜나갔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곧 고난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했다. 1919년 12월 2일 승려의용승군제 추진과 관련해 피속된 스님은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이번에 진관사에서 나온 태극기와 독립운동 자료도 초월 스님이 구속되기 직전 급하게 숨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초월 스님은 온갖 고문을 겪으며 불구, 정신이상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초월 스님은 출소 뒤 진관사 마포 포교당(극락암)에 머무르며 몸과 마음을 추스른 뒤 다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전국 사찰을 돌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고 그 돈을 다시 임시정부로 보냈다. 특히 1939년 봉천행 화물차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썼던 박수남이 초월 스님과 깊은 관련이 있음이 드러나 다시 피속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광복을 1년 남짓 앞둔 1944년 6월 청주 형무소에서 마침내 순국했다.

 

김 교수는 당시 진관사에서 초월 스님 지도로 공부했던 금봉(1919~) 스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밤하늘의 별은 저렇게 총총한데 우리나라는 언제 독립을 되찾을 수 있을까” “계란을 가지고 삼각산을 쳐도 삼각산이 없어질리 없다”는 등 초월 스님이 남겼던 말을 논문에 소개하기도 했다.

김 교수는 “이번 자료를 통해 진관사가 상해 임시정부 불교계 국내 연락본부 역할을 담당했으며, 불교계 총 책임자는 초월 스님이었다는 점이 밝혀졌다”고 강조했다. 진관사 주지 계호 스님도 “빼앗긴 조국을 되찾으려는 초월 스님 등 열사들의 숭고한 의지가 진관사를 통해 오늘에 전해진 것은 매우 소중한 인연이며 엄중한 책무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진관사가 우리 역사를 되살리고 한국불교에 있어 많은 역할을 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여기며 쉼 없이 정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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