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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의 여운 깊은 책읽기] 압니다, 제가 압니다.

기자명 법보신문

『행운아-어느 시골의사 이야기』/존 버거·장모르 지음/김현우 옮김/눈빛

몸이 아픈 사람은 의사를 보기만 해도 커다란 위안을 얻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합니다.
환자는 병을 앓는 순간 단순히 몸이 아픈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익숙한 관계들과 분리된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심한 외로움에 사로잡히는 이때 의사는 환자와 분리되어 떠나간 외부세계를 이어주고 메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환자는 의사를 보며 위안을 얻습니다.

또한 환자는 누구나 앓고 있는 병이라 해도 자신에게 찾아온 질병은 특별하다고 느낍니다. 온전히 유지되어오던 자신의 세계관이 질병으로 금이 가고 파괴될 때 사람은 질병의 위협에 겁을 먹습니다. 의사가 질병의 이름을 알아내어 가리켜줄 때 환자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자신을 송두리째 위협한 그 녀석의 정체를 알아냈다면 이제 막연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사는 환자의 마음속에서 두려움을 없애줍니다.

환자의 지독한 외로움과 두려움을 모르는 의사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의사들은 환자의 그런 감정 상태를 애써 외면하거나 무시합니다. 하지만 의사 사샬은 다릅니다.
한번은 한 남자의 가슴에 주사 바늘을 깊이 찔러 넣었다. 남자는 매우 불쾌한 모양이었다. 남자가 자신의 거북한 속을 어떻게든 설명해보려 한다.
“거기는 제 목숨 같은 뎁니다. 바늘을 찔러 넣은 바로 거기요.”
“압니다.” 사샬이 말했다.

“기분이 어떤지 압니다. 나는 지금 눈 주위가 그래요. 거기 뭐가 닿으면 도저히 못 견디겠습디다. 나한테는 거기가 목숨 같은 자리인 셈이죠. 눈 바로 밑에 말입니다.”
존 사샬(John Sassall)- 영국에서도 문화적으로 가장 심하게 황폐한 곳에서 25년 간 마을사람들을 치료하는 시골의사입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낙후된 지역의 사람들과 비교해볼 때 의사인 사샬은 행운아이고 특권계층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운을 혼자만 만끽하지 않습니다. 환자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고, 환자를 알아주고, 환자의 마을을 위해 봉사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행동이 낭만적인 온정주의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는지를 끊임없이 되묻습니다.

의사에 대한 책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붓다를 가리켜 의왕(醫王)이라고 하는데 바로 의사 중에 최고 의사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붓다가 지금 의사의 하얀 가운을 입었다면 그가 환자를 대하는 방식은 어떠할까? 정확하게 질병의 원인을 밝혀내고 멋지게 수술을 해내겠지만 그러기에 앞서 지독한 두려움과 외로움에 사로잡힌 환자의 상태를 알아주고 공감해주지 않을까 합니다. 마치 시골의사 사샬이 제 상태를 호소하는 환자를 향해 마음으로부터 공감하며 이렇게 대답하듯이 말입니다.
“압니다, 압니다. 제가 압니다.” 

이미령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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