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명추회요 강설] 온갖 법이 마음 자성인 줄 알면 부처님 지혜 성취

기자명 법보신문
 
장승업의 송하노승도. 서울대박물관 소장.

1. 모든 중생이 다함께 성불

문장에 집착 말고
숨은 참 뜻 찾아
본디 종지 계합해야

若欲硏究佛乘 披尋寶藏 一一須消歸自己 言言使冥合眞心. 但莫執義上之文 隨語生見 直須探詮下之旨 契會本宗則 無師之智現前 天眞之道不昧. 如華嚴經云 知一切法 卽心自性 成就慧身 不由他悟.

만약 ‘모든 중생이 다함께 성불할 수 있는 가르침’을 알고자 한다면, ‘부처님의 경전’을 보면서 가르침 하나하나가 자신한테 녹아들어야 하고, 하시는 말씀 하나하나의 뜻이 참마음에 그윽하게 모아져야 한다. 드러난 문장에 집착하여 말만 따라 잘못된 견해를 내지 말아야 하고, 바로 논리 뒤에 숨어 있는 참뜻을 찾아 본디 종지에 계합해야 한다.

그러면 스승의 도움 없이도 저절로 알아지는 무사지(無師智)가 눈앞에 드러나고, 자연스레 생긴 그대로가 도인 천진도(天眞道)에 어둡지 않게 된다. 이는 마치 『화엄경』에서 “온갖 법이 마음의 자성인 줄 알면 ‘부처님의 지혜’를 성취하게 되니 이는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 것과 같다.

강설) ‘모든 중생이 다함께 성불할 수 있는 가르침’을 ‘불승(佛乘)’이라고 한다. 이 법은 이승 삼승으로 나누지 않고 오로지 하나 성불하는 법만 설하므로 ‘일승(一乘)’ 또는 ‘일불승(一佛乘)’이라 말하기도 한다. 『법화경』에서는 “여래는 오직 일불승으로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한다(如來 但以一佛乘故 爲衆生說法)”고 하였다. ‘부처님의 경전’은 보통 팔만대장경을 말하는데, 모든 중생의 고통을 제도할 수 있는 보배로운 법을 쌓아둔 것이라 하여 ‘보장(寶藏)’ 또는 ‘법장(法藏)’이라고도 한다.
이 단락의 요지는 모든 중생이 다함께 성불할 수 있는 경전의 참뜻을 스스로가 알아야만 깨달음이 온다는 것이다.

2. 문자를 가지고 병을 다스려

六相으로 단견 끊고
十玄門으로 통해야
분별 알음알이 끊어져

我此無礙廣大法門 如虛空非相 不拒諸相發揮 似法性無身 匪礙諸身頓現. 須以六相義該攝 斷常之見方消 用十玄門融通 去取之情始絶. 又 若實得一聞千悟 獲大總持 卽胡假言詮. 無勞解釋 船筏爲渡迷津之者 導師因引失路之人. 凡關一切言詮 於圓宗所示 皆爲未了 文字性離 卽是解脫. 迷一切諸法眞實之性 向心外取法 而起文字見者 今還將文字對治 示其眞實.

걸림 없이 넓고 큰 나의 법문은 마치 허공이 모양이 없는데도 온갖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법성(法性)이 몸이 없는데도 온갖 몸이 나타나는 것을 거리끼지 않는 것과 같다. 모름지기 ‘육상(六相)’의 이치로 감싸 거두어야 단견과 상견이 사라지고 ‘십현문(十玄門)’으로 오롯하게 통해야 분별하는 알음알이가 끊어진다. 실로 하나를 듣고 천 가지를 깨달아 ‘대총지(大總持)’를 얻는다면 어찌 언어로 이치를 논하려고 하겠는가.

수고롭게 알고 풀이할 것이 없으니, 뗏목과 배는 물을 건너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길을 안내하는 사람은 길 잃은 사람을 인도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종(圓宗)에서 온갖 말로 이치를 전개하여 보여주는 것들은 모두 깨닫지 못한 사람을 위함이니, 문자의 속성을 벗어나는 것이 곧 해탈이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에 미혹하여 마음 밖에서 법을 취하려 문자에 집착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지금 도리어 문자를 가지고 이 병을 다스려 그 진실을 보이려고 한다.

강설) 화엄종은 육상(六相)의 이치로 이 세상 모든 것은 연기법으로 ‘분별할 실체가 없다’는 이치를 설명하니, 육상은 총상(總相) 별상(別相) 동상(同相) 이상(異相) 성상(成相) 괴상(壞相)을 말한다.

비유해 한 채의 집이 ‘총상’이라면 집을 구성하는 서까래나 기와 기둥은 ‘별상’이 된다. 서까래나 기와 기둥의 인연이 모여 한 채의 집을 만들므로 ‘똑같이 집을 만드는 모습’을 갖고 있다고 하여 이를 ‘동상’이라 하고, 이 인연이 한 채의 집을 만들면서도 저마다 ‘다른 역할의 모습’을 갖고 있으니 이를 ‘이상’이라고 한다. 서까래나 기와 기둥의 여러 인연이 어울려 집을 만드니 이를 ‘성상’이라 하고, 집 모양 속에서 서까래나 기와 기둥은 그 자체로 집이 아니기에 이를 ‘괴상’이라고 한다.

집이라는 개념은 서까래나 기와 기둥 등의 여러 인연이 모여 임시로 만들어진 것이지, 그 구성물을 하나하나 따져 볼 때 집이라는 어떤 실체가 없으므로 ‘집이 있다’라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관점이 ‘상견(常見)’을 없앤다는 의미이다. 서까래나 기와 기둥 등의 구성물이 집이 아니지만 전체가 어울려 집을 만들고 있으므로 ‘집이 없다’라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관점이 ‘단견(斷見)’을 없앤다는 의미이다.

십현문(十玄門)은 열 가지 이치에 통하면 ‘화엄’의 깊은 도리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 열 가지 문은 서로 인연되어 일어나는 ‘연기법’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는 공성(空性)과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서로 걸림이 없다는 뜻이다. 화엄종에서는 십현문과 육상의 이치를 근본교리로 삼아 예로부터 ‘십현육상(十玄六相)’이라 말해 왔다. 십현문은 다음과 같다.

말로 이치 전개함은
중생 위함이니
문자 벗어나면 곧 해탈

첫째는 법계의 성품과 드러나는 현상에 거리낄 것이 없다는 ‘성상무애(性相無碍)’이다. 둘째는 공간에 넓고 좁은 대립이 있어 서로 모순이 되는 것 같지만 상즉상입(相卽相入)의 도리가 있어 서로 거리낄 것이 없다는 ‘광협무애(廣狹無碍)’이다. 셋째는 하나가 여럿이 되고 여럿이 하나가 되는 데 거리낄 것이 없다는 ‘일다무애(一多無碍)’이다. 넷째는 서로의 모습으로 들어가는 데 거리낄 것이 없다는 ‘상입무애(相入無碍)’이다.

다섯째는 자신이 곧 상대이니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상대가 곧 자신이니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상대와 자신이 존재하고 사라짐이 동시인 ‘상즉무애(相卽無碍)’이다. 여섯째는 ‘공성(空性)’에선 연기법으로 나타나는 모든 법들이 사라지고, 연기법에선 ‘공성’이 사라져 서로 거리낄 것이 없다는 ‘은현무애(隱顯無碍)’이다.

일곱째는 연기법으로 상입(相入)의 도리를 설명할 때 자신의 모습을 파괴하지 않는 점에 특별히 착안하여, 매번 하나의 현상이 일어날 때에 작은 것으로 큰 것에 들어가고 하나로 많은 것을 거둠에 어지럽지 않아, 하나의 모습이나 많은 모습이 파괴되지 않고 질서정연하여 서로 걸림이 없다는 ‘미세무애(微細無碍)’이다. 여덟째는 제석천의 그물코 맑은 구슬 속에 주변의 모든 것을 중중무진으로 비추는 것처럼 삼라만상 모든 것에 하나하나 서로의 모습을 다 드러내고 있다는 ‘제망무애(帝網無碍)’이다.

아홉째는 과거 현재 미래 삼세(三世)에 저마다 또 삼세가 있어 이를 합치면 구세(九世)가 되고, 이 구세가 한 생각에 거두어지니 이를 합쳐 십세(十世)라고 한다. 한 생각에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들어 있어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서로 걸림이 없다는 ‘십세무애(十世無碍)’이다. 열째는 연기법의 모든 현상에서 하나를 들면 이것이 주체가 되고 나머지 모든 현상은 이 하나에 동반되니, 이처럼 서로 주체와 동반이 되어 서로 걸림 없이 온갖 덕을 다 갖추고 있다는 ‘주반무애(主伴無碍)’이다. ‘대총지(大總持)’는 온갖 공덕을 다 지니고 있다는 깨달음의 다른 표현이다.

자신의 참 성품보면
그 자체가 무심이라
약과 병 다 사라져

若悟諸法本源 卽不見有文字及絲毫發現 方知一切諸法 卽心自性 則境智融通 色空俱泯. 當此親證圓明之際 入斯一法平等之時 又有何法是敎而可離 何法是祖而可重 何法是頓而可取 何法是漸而可非 則知皆是識心橫生分別. 所以 祖佛善巧 密布權門 廣備敎乘 方便逗會. 纔得見性 當下無心 乃藥病俱消 敎觀咸息.

만약 모든 법의 근원에서 어떤 개념이나 조그마한 모습도 보지 않는다면 바야흐로 온갖 법이 곧 마음의 자성임을 안 것이니, 이 자리에 경계와 지혜가 오롯하게 통하고 색(色)과 공(空)이 함께 사라진다.

오롯하게 밝은 마음을 몸소 증득하여 한 가지 법으로서 평등한 곳에 들어갈 때, 어떤 법을 교(敎)라 하여 벗어날 수 있는 것이며, 어떤 법을 조사(祖師)의 가르침이라 하여 존중할 수 있을 것이며, 어떤 법을 돈(頓)이라 하여 취할 수 있는 것이며, 어떤 법을 점(漸)이라 하여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이 모든 게 중생의 알음알이가 제멋대로 분별한 것임을 곧 안다. 그러므로 부처님과 조사 스님의 훌륭한 기교로 치밀하게 상황에 따라 펼쳐지는 광범위한 가르침은 방편으로 쓰이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신의 참 성품을 보면 그 자리가 무심이라서 약과 병이 다함께 사라지니, ‘교(敎)다’ ‘선(禪)이다’ 하는 분별이 다 함께 없어진다.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