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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강설] 알음알이 사라지면 무상〈無相〉 진리 절로 드러나

기자명 법보신문

常見은 있다·斷見은 없다 집착하는 것
어떤 집착도 없는 참마음이 부처님 세상
宗通은 보살을, 說通은 초학자 위한 것
스승은 반드시 종통·설통 함께 갖춰야

 
김명국 作. 노엽달마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3. 어떠한 집착도 없는 것

1 大涅槃經云 若人聞說大涅槃 一字一句 不作字相 不作句相 不作聞相 不作佛相 不作說相 如是義者 名無相相. 2 釋曰 若云 卽文字無相 是常見 若云 離文字無相 是斷見. 又 若執有相相 亦是常見 若執無相相 亦是斷見. 但亡情 卽離斷常 四句百非 一切諸見 其旨自現. 當現入宗鏡之時 何文言識智之能詮述乎. 3 所以 先德云 若覓經 了性眞如無可聽 若覓法 雞足山間問迦葉 大士持衣在此山 無情不用求某甲. 斯則豈可運見聞覺知之心 作文字句義之解. 4 若明宗達性之者 雖廣披尋 尙不見一字之相 終不作言詮之解. 以迷心作物者 生斯紙墨之見耳.

1. 『대열반경』에서 “만약 어떤 사람이 대열반에 대해 설하는 것을 들으면서, 한 글자 한 구절에도 집착하지 않고 듣거나 설했다는 생각도 내지 않으며 부처님이란 생각도 내지 않는다면, 이는 어떠한 집착도 없는 모습이니 ‘무상상(無相相)’이라 한다.”고 하였다.

2. 이를 풀이해 보겠다. 만약 문자에서 무상(無相)을 말한다면 상견이요 문자를 떠나 무상을 말한다면 단견이다. 또 어떠한 모습이 있다는 상(相)에 집착하면 또한 상견이요, 어떠한 모습도 없다는 상(相)에 집착하면 또한 단견이다. 다만 알음알이만 사라지면 문자에 집착하는 상견이든 문자에서 벗어나려는 단견이든 온갖 논리 온갖 견해에서 그 뜻이 저절로 나타난다. 깨달아 종경(宗鏡)에 들어갈 때 어찌 문자나 언어의 알음알이 분별로 이 경지를 드러내 설명할 수 있겠는가.

3. 그러므로 옛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는다면 참 성품을 깨달은 진여 그 자리에서는 들을만한 것이 없고, 만약 법을 찾는다면 계족산에서 가섭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가섭이 가사와 발우를 들고 계족산에 있다지만 알음알이가 떨어진 곳에서는 법을 전하려고 누구를 찾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러니 어찌 보고 듣고 아는 마음으로 문자 풀이하는 알음알이를 짓겠는가.

4. 만약 종지에 밝고 참 성품에 통달한 사람이라면, 널리 경전 속의 문장을 살피더라도 오히려 한 글자에도 집착하지 않으니, 끝내 언어의 논리로 드러내는 알음알이를 짓지 않는다. 어리석은 중생만이 문자에 집착한 견해를 내기 때문이다.

강설) 집착은 허깨비처럼 없는 것을 실재 있다고 착각하거나,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하여 일으키는 중생의 시비분별이다. ‘상견(常見)’은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여 집착하는 것이요, ‘단견(斷見)’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여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 사실을 깨달아 어떠한 집착도 없는 것, 집착이 없다는 그 생각조차 없는 것을 ‘무상상(無相相)’이라 한다. 이것이 종경이요 참 성품을 깨달은 진여이며 알음알이가 떨어진 곳이다. 아무런 집착이 없는 여기서 어찌 계족산에서 미륵불을 기다리고 있는 가섭을 찾아 법을 물을 것이며 언어의 논리로 드러내는 알음알이를 짓겠는가.

4. 법의 성품을 의지하여

以要言之 但一切無邊差別佛事 皆不離無相眞心而有. 如華嚴經 頌云 佛住甚深眞法性 寂滅無相同虛空 而於第一實義中 示現種種所行事 所作利益衆生事 皆依法性而得有 相與無相無差別 入於究竟皆無相.

요점을 말하자면 다만 무수한 차별경계로 드러난 온갖 ‘부처님의 일’들이 모두 ‘어떠한 집착도 없는 참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화엄경』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이 법의 성품 머무시기에
적멸이어 상이 없고 허공 같지만
으뜸가는 진실한 뜻 가운데에서
가지가지 행하는 일 보여주시네.

중생에게 부처님이 이익 주는 일
법의 성품 의지하여 있는 것이니
모양새가 ‘있다’ ‘없다’ 차별이 없어
마침내는 모든 것이 무상(無相)이로다.

강설) ‘불사(佛事)’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절을 짓고 부처님이나 탑 또는 종 같은 것을 조성하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불사의 참뜻은 ‘부처님의 일[佛事]’이니, 고통 속에 있는 세상 사람들을 인도하여 행복이 가득한 부처님의 세상으로 모시는 데 있다. 그러므로 온갖 부처님의 일이 ‘어떠한 집착도 없는 참마음[無相眞心]’을 벗어나지 않는다. ‘어떠한 집착도 없는 참마음’이 부처님의 세상이기 때문이며 이것이 바로 ‘법의 성품[法性]’이다.

그 마음은 고요하고 고요하여 온갖 시비분별이 떨어져 어떠한 모습도 없어 허공과 같다[寂滅無相同虛空]. 이것이 최고의 가르침으로서 진실한 뜻이다[第一實義]. 이 가르침 속에서 시비분별이 떨어져 집착할 어떤 모습도 없는 것, 이를 ‘무상(無相)’이라고 한다.

5. 차가운지 뜨거운지 스스로

問 悟道明宗 如人飮水 冷暖自知 云何說其行相 答 前已云 諸佛方便不斷 今時密布深慈 不令孤棄. 已明達者 終不發言 只爲因疑故問 因問故答. 1 於楞伽會上 爲求法者 親說此二通 一宗通 二說通 宗通爲菩薩 說通爲童蒙. 祖佛俯爲初機童蒙 少垂開示 此約說通. 只爲從他覓法 隨語生解 恐執方便爲眞實 迷於宗通. 是以 分開二通之義. 2 宗通者 謂緣自得勝進相 遠離言說文字妄想 乃至 緣自覺趣光明輝發. 若親到自覺地 光明發時 得云 如人飮水 冷暖自知. 如群盲眼開 分明照境 驗象眞體 終不摸其尾牙. 見乳正色 豈在談其鵠雪. 當此具眼人前 若更說示 則非知時大法師也.

문 : 도道를 깨달아 근본을 밝히는 것은, 사람이 물을 마셔보고 그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지를 스스로 아는 것과 같은데, 무엇 때문에 그 행상(行相)을 설파하십니까?
답 : 이미 앞서 말하듯 모든 부처님께서는 끊임없는 방편으로 지금도 크나큰 자비를 두루 펼쳐 중생을 외롭게 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밝게 통달한 사람이야 끝내 말할 것이 없지만, 다만 의심이 있음으로 묻고, 물음이 있음으로 답할 뿐이다.

1. 능가회상(楞伽會上)에서 법을 구하는 사람을 위하여 부처님이 몸소 종통(宗通)과 설통(說通)을 설하셨으니, 종통은 보살을 위하고 설통은 초학자를 위한 것이다. 부처님과 조사 스님께서 초학자 근기에 맞추어 조금 법을 일러 주신 것, 이는 설통을 기준한 것이다. 이처럼 종통과 설통의 두 가지 이치로 나눈 까닭은 다만 수행자들이 밖에서 법을 찾고 말에 따라 알음알이를 내면서 방편을 진실로 삼아 이에 집착하여 종통에 미혹해짐을 걱정한 것이다.

2. 종통이란 스스로 터득한 뛰어난 정진력으로 언설과 문자에 대한 집착망상을 멀리 벗어나, 스스로 깨달아 광명이 빛나는 곳으로 나아감을 말한다. 만약 몸소 스스로 깨달아서 광명이 빛나는 곳에 도달할 때, “사람이 물을 마시고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지를 스스로 아는 것과 같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장님이 눈을 떠서 코끼리의 전체 모습을 분명히 본 것과 같으니, 끝내는 다시 코끼리 꼬리나 상아를 더듬지 않는다. 직접 우유를 본 사람이 어찌 백조와 흰 눈이 하얗다고 이를 우유라 말하겠는가. 법을 보는 안목을 갖춘 사람 앞에서 다시 법을 설하려고 한다면 이는 시절인연을 아는 훌륭한 법사가 아니다.

강설) 선종은 바로 자신의 참마음을 깨달아 그 마음으로써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삼는다. 종통(宗通)은 바로 이 마음에 통하는 것이요, 이 마음으로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을 없애 주기 위하여 막힘없이 법을 설하는 것을 설통(說通)이라 한다. 종통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깨치는 것이요, 설통은 다른 사람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종통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설통은 부처님의 지혜이다. 그러니 부처님의 법으로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사람은 반드시 종통과 설통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

종통은 법을 보는 안목을 갖춘 보살들을 위한 것이고 설통은 아무 것도 모르는 초학자를 위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법을 보는 안목을 갖춘 보살 앞에서 법을 설하려고 하는 선지식이 있다면 이는 종지에 통하지 못한 사람이다. 종지에 통하지 못하면 시절인연을 알고 법을 설하는 훌륭한 법사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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