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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추회요 강설] 부처님 말씀이라도 집착하면 망념이 된다

기자명 법보신문

중생 눈으로 법계를 보면 중생계
부처님 눈으로 보면 부처님 세상

오염된 인연 따르면 아뢰야식
깨끗한 인연을 따르면 여래장

마음이 곧 공인 까닭은
자성 없이 인연 따라 일어나기 때문

 
달마도. 일지 이홍기 作. 관음암 소장.

6. 법계에 들어가는 것

1 百門義海 云. 入法界者 卽塵緣起是法 法隨智顯 用有差別是界. 此法 以無性故 則無分劑 融無二相 同於眞際 與虛空等 遍通一切 隨處顯現 無不明了. 然此一塵與一切法 各不相見 亦不相知. 何以故 由各各全是圓滿法界 普攝一切 更無別法可知見也. 2 經云 卽法界無法界 法界不知法界. 若如是更無別法可知見者 云何言入 以悟了之處 名爲入故. 又 雖入而無所入 若有所入 則失諸法性空義. 3 以無性理同故 則處處入法界. 前約情智凡小所見 隨染淨緣 成十法界者 卽成其過 今依華嚴性起法門 悉爲眞法界. 若成若壞 若垢若淨 全成法界 如經云 分別諸色無量壞相 是名上智者. 4 古釋云 六道之色 壞善壞定 二乘之色 壞因壞果 菩薩之色 壞有壞無 佛色者 壞上諸壞 壞爲法界 非壞非不壞 悉是法界.

『백문의해』에서 말하였다.

1. ‘법계(法界)에 들어가다’에서, ‘법(法)’이란 경계에서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을 말하고, 이 법이 지혜의 작용으로 드러나 그 쓰임새에 차별을 보이는 것이 ‘계(界)’이다. 이 법은 결정된 성품이 없으므로 나눌 게 없이 오롯하여 다른 모습이 없으니 진제(眞際)와 같다. 허공처럼 모든 곳에 두루 통하고 가는 곳마다 드러나 분명하지 않은 게 없다. 그러나 이 하나의 경계는 모든 법과 더불어 저마다 서로 보지 못하고 서로 알지도 못하니, 왜냐하면 각각이 전부 오롯한 법계로서 두루 모든 것을 거둠으로 다시 알고 볼 수 있는 다른 법이 없기 때문이다.

2. 경에서는 “법계 자체에 법계가 없어 법계는 법계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만약 이처럼 다시 알고 볼 수 있는 다른 법이 없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법계에 들어간다’ 말하는가. 이는 ‘깨닫는 그 자리’가 바로 ‘법계(法界)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또 법계에 들어가더라도 들어간 곳이 없으니, 들어간 곳이 있다면 ‘모든 법의 성품이 공(空)’이라는 이치에 어긋난다.

3. 결정된 성품이 없는 이치로써 같으므로 곧 가는 곳마다 법계에 들어간다. 앞에서 언급한 범부나 소승의 알음알이로 보아 오염되거나 깨끗한 인연을 따라 ‘열 가지 법계’를 이룬 것은 곧 중생의 허물이 되지만, 지금 화엄의 ‘성기법문(性起法門)’에 의지하는 것은 모두 부처님의 참다운 법계가 된다. 완성되건 파괴되건 더럽든 깨끗하든 전부 부처님의 법계가 된다. 이는 마치 경에서 “온갖 색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부서지는 모습을 분별하면 수승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4. 옛날에 이것을 해석하여 “육도(六道)의 색은 선(善)이나 악(惡)을 허무는 것이요, 이승(二乘)의 색은 인(因)이나 과(果)를 허무는 것이고, 보살의 색은 유(有)나 무(無)를 허무는 것이며, 부처님의 색은 위에서 말한 온갖 허뭄을 허무는 것이니 허무는 자체가 법계가 되며, 허무는 것도 아니면서 허물지 않는 것도 아닌 모든 것이 법계이다.”라고 하였다.

강설) ‘모든 법의 성품이 공(空)’인데 이 ‘공성(空性)’이 인연 따라 세상에 드러난 것이 법계이다. 경계에서 인연 따라 일어난 것이 법(法)이고, 이 법이 지혜의 작용으로 드러나 그 쓰임새에 차별을 보이는 것이 계(界)이다. 이 법계에서 공성을 보지 못하는 범부는 ‘선악(善惡)’에 집착하고 이승은 ‘인과(因果)’에 집착하며 보살은 ‘유무(有無)’에 집착하여 그들의 세상인 열 가지 법계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부처님은 법의 성품이 공인 줄 알기에 이 모든 집착을 떠나 그들의 관념을 허무니 이것이 성기법문(性起法門)이다. ‘공성’ 그 자체는 언제나 변함이 없어 ‘진여’ 또는 ‘진제(眞際)’라고도 한다. 중생의 눈으로 보면 법계는 중생계요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부처님의 세상이다.

7. 모든 범부가 선정에

1 隨染緣之時 迷作阿賴耶 隨淨緣之時 悟成如來藏. 本末展轉 唯是一心 畢竟無別. 如無生義云 衆生身中有涅槃 卽是末中含有本 衆生是涅槃家用 卽是本中含有末 貪欲卽是道 卽是末中含有本 貪欲卽是道家用 卽是本中含有末. 故經言 一切凡夫 常在於定. 2 問言 常在何定. 答言 以不壞法性三昧故 此是末中含有本. 法性中含有衆生 卽是本中含有末 如氷與水.

1. 오염된 인연을 따를 때는 미혹하여 아뢰야식이 되지만 깨끗한 인연을 따를 때는 깨달아 여래장이 된다. 근본과 곁가지가 뒤섞여 전개되나 오직 하나의 마음일 뿐 끝내 다를 것이 없다. 이는 마치 『무생의』에서 “중생 몸에 열반이 있으니 곁가지 가운데 근본을 품고 있고, 중생은 열반의 쓰임새이니 근본 가운데 곁가지를 품고 있다. 탐욕이 곧 도이니 곁가지 가운데 근본을 품고 있고, 탐욕은 도의 쓰임새이니 근본 가운데 곁가지를 품고 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경에서 “모든 범부가 늘 선정에 있다.”고 하였다.
2. 묻기를 “늘 어떤 선정에 있습니까.” 하면, 답하기를 “허물어지지 않는 법성 삼매에 있다.”고 하니, 이는 곁가지 가운데 근본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법성 가운데 중생이 있는 것은 곧 근본 가운데 곁가지를 품고 있는 것이니, 이는 물과 얼음의 관계와도 같다.

강설) 무명에 덮여 전개되는 마음을 아뢰야식이라고 하고, 이를 깨달아 부처님을 아는 마음을 여래장이라고 하지만, 근본은 오직 하나 부처님의 마음일 뿐 다를 것이 없다. “모든 범부가 늘 선정에 있다.”고 한 것은 범부들이 부처님의 마음 안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중생들이 시비분별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허물어지지 않는 법성 삼매’는 영원한 법으로서 행복한 마음자리이니 부처님의 마음이다. 이는 물이 얼음으로 변했어도 얼음은 여전히 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다.

8. 온갖 언설이 진실

1 勝思惟梵天所問經 云. 梵天謂文殊言 仁者所說 皆是眞實. 文殊曰 善男子 一切言說皆是眞實. 問曰 虛妄言說亦眞實耶. 答曰 如是 何以故 善男子 是諸言說 皆爲虛妄 無處無方. 若法虛妄 無處無方 卽是眞實. 以是義故 一切言說 皆是眞實. 善男子 提婆達多所有言說 與如來語 無異無別. 何以故 諸有言說 皆是如來言說 不出如故. 諸有言語所說之事 一切皆以無所說故 得有所說. 2 先德 云. 未念之時 念則未生 未生則是不有 不有之法 亦無自相. 現在之念 從緣而生 念若自有 不應待緣. 待緣生故 卽無自體. 故知 心無自性 緣起卽空. 如欲斷其流 但塞其源 欲免其生 但斷其根 不用多功 最爲省要.

1. 『승사유범천소문경』에서 범천이 문수에게 “그대가 말씀하신 게 모두 진실입니까?” 하니, “선남자여, 온갖 언설이 다 진실이다.” “허망한 언설도 진실이란 말입니까?”

문수 : 맞다. 왜냐하면 선남자여, 온갖 언설은 다 허망하여 어떤 처소나 방향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법이 허망하여 처소나 방향이 없다면 곧 진실이다. 이런 이치로 온갖 언설이 다 진실이다. 선남자여, 제바달다의 온갖 언설도 여래의 말씀과 다를 것이 없다. 무엇 때문인가. 온갖 언설이 다 여래의 언설이니 여여(如如)한 자리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로 설해진 모든 일이 다 설해진 바가 없으므로 설해진 바가 있다.

2. 옛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아직 한 생각 일어나지 않았을 때 망념은 생겨나지 않았고, 망념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법 또한 자체의 모습이 없다. 현재의 망념은 인연에서 생겨나니, 망념 자체가 실제 있는 것이라면 인연을 기다려 생겨나지 않는다. 인연을 기다려 생겨나는 것이므로 스스로의 바탕이 없다. 그러므로 마음은 자성 없이 인연으로 일어나니 곧 공空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물의 흐름을 끊으려면 다만 물의 근원을 막아야하고, 생사의 흐름을 면하려면 오직 생사의 뿌리를 잘라야하는 것처럼, 이것을 아는 것이 많은 공을 들이지 않고 공부를 성취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강설) 온갖 언설, 심지어 부처님께 대항하는 제바달다의 언설까지도 다 여래의 말씀과 다를 게 없는 진실이라 한다. 이는 망념이 생겨나기 전 공성의 이치를 깨달은 부처님의 영역에서 하는 말이다. 주객이 사라지고 능소가 사라진 텅 빈 충만 여여(如如)한 그 자리에서 온갖 언설의 실체를 알고 집착을 벗어나 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중생의 영역에서는 온갖 언설 심지어 부처님의 말씀까지라도 집착하면 망념이 된다. 『허공장경虛空藏經』에서 “글도 마구니의 업이요 이름과 모양도 마구니의 업이며 부처님의 말씀조차 마구니의 업이다.[文字是魔業 名相是魔業 至於佛語 亦是魔業]”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원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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