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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삶이 빚어낸 언어의 결정체

기자명 법보신문
  • 교계
  • 입력 2010.03.13 15:04
  • 댓글 0

‘법정 스님의 문학세계’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장영우 교수
쉽고 간결한 문체로 무소유 사상 전파
욕망과 집착 얽매이지 않는 자유 추구

 
법정 스님이 오랫동안 상주했던 불일암. 70년대 후반 스님이 손수 지은 이곳은 이제 현대문학의 산실이 됐다.

법정 스님이 2010년 3월 11일 오후 1시 52분 열반에 드셨다. 법랍 55세, 세수 78세. 스님이 입적하시기 바로 전날, 때아니게 탐스런 함박눈이 내린 것은 스님의 흰 무명처럼 정갈하고 무염(無染)한 이승에서의 삶을 기리기 위한 하늘의 배려였을까. 온 세상을 하얀 꽃으로 뒤덮어 우리의 정신을 황홀케 하더니 봄햇볕을 받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종교와 교파를 떠나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스님도 그렇게 훌쩍 남루한 육신을 벗고 피안의 세계로 가신 것이다.

평소 ‘무소유’의 삶을 강조하던 스님은 “관과 수의를 따로 만들지 말고 평소의 승복을 입힌 채로 화장하며 사리를 찾으려 하거나 탑을 세우지 말라”는 말을 남기셨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모처럼 언행이 일치하는 수도승, 지식인의 참모습을 본다. 스님은 일찍이 “내가 살 만큼 살다가 목숨이 다해 이 몸이 내 것이 아니게 될 때 침상째 들어다 불태워버리면 일거리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한 번 이 육신에 대한 증거인멸의 의식을 치러야 할 테니까.”라고 당신의 사후 일을 말씀하셨는데, 스스로 잊지 않고 실천한 것이다.

법정 스님은 선승이면서 학인이었고, 문장가이면서 실천가였다. 스님은 잠깐 동안의 행정소임을 맡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평생 조계산 불일암과 강원도 암자에서 청정·고독한 수도생활을 했다. 그러면서도 속세의 일에 많은 관심을 보였고, 1970년대에는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날선 비판의 글을 썼다. 스님의 『무소유』는 지금까지 300만부 이상 팔린 초베스트셀러다. 스님은 글쓰기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였는데, 『산방한담』·『서 있는 사람들』 등 십여 권의 수상집과 『선가귀감』·『숫타니파타』·『법구경』 등 불교번역서, 그리고 『인도기행』 등 말 그대로 등신대(等身大)의 책을 저술했다.

『무소유』는 법정 스님의 대표적 수필로 널리 회자된다. 지난해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도 “스님이 ‘무소유’를 주장하지만 이 책만은 소유하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이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고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지인에게서 선물 받은 난을 애지중지 기르다 그것도 집착임을 깨닫고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는 『무소유』의 교훈은 『세간과 출세간』·『버리고 떠나기』·『크게 버려야 크게 얻는다』·『적은 것으로 만족하라』·『놓아두고 가기』 등으로 이어지며 스님의 평생 화두가 된다. 스님의 무소유 혹은 청빈 사상은 “나는 보다 더 단순하고 소박하게, 그리고 없는 듯이 살고 싶다”는 말로 요약된다.

『무소유』로 필명을 날리기 시작한 스님은 1970년대의 강팍한 비민주적 정권을 향해서도 예리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다. 스님은 자신에게 온 편지가 사전검열되는 일에 매우 불쾌해하면서도 “그러나 이런 일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공기를 산에서 사는 내가 혹시 망각이라도 할까봐, 나를 깨우쳐 주기 위해 있는 일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이 땅에 뿌리박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달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우리 처지 아닙니까.”라는 유머감각을 발휘하기도 한다. 70년대의 스님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열혈한이었는데, 함석헌·장준하·김동길 선생과 『씨의 소리』 편집회의를 하던 도중 “그 날의 모임에 누구누구가 참석했다고 담당형사가 전화로 상부에 보고 중인 장면을 목격하고는 홧김에 그 전화기를 빼앗아 그의 면전에서 돌에 박살을” 낼 만큼 담대한 사내였다.

스님은 산속에 있다 모처럼 도회로 나오면 영화도 보고 전시장도 다니면서 이 시대의 흐름을 직접 호흡하기를 즐겼다. 스님에겐 그런 모든 행동이 “세상물정과 인간의 심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학습의 기회”, 즉 수행의 연장이었던 셈이다. 스님은 독서열도 대단해 불교관련 서적은 물론이거니와 문학작품도 부지런히 읽었다. 스님의 책을 보면 생텍쥐페리·임어당·로망 롤랑·마르틴 부버·칼릴 지브란·니코스 카잔차키스 등 외국 문학인이나 철학자의 책이 자주 보이고 심지어는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을 “이틀 반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책 읽기에만 매달렸다. 그 만큼 이 소설은 강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칭찬한다. 뿐이랴, 스님은 직접 빨래를 해 널면서 휘파람으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를 부를 정도의 낭만과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잘 아는 것처럼, 이 노래는 서정주 시에 송창식이 곡을 붙인 대중가요다.

1980년대 이후 스님의 글에서는 정권에 대한 비판이 점차 줄어들고 불교와 사찰, 불자에 대한 쓴소리가 많아진다. 그것은 1975년 인혁당 사건으로 생때같은 청년들이 사형을 당한 사건을 접하면서 “명색 출가 수행자로서 마음에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는다는 일에 자책”을 느끼고 불일암에 칩거했기 때문이다. 외부로 향했던 그의 관심이 수행자인 자신과 절집 내부로 향한 것이다. 그는 절마다 요란스레 벌이는 대형불사를 못마땅해 하고, 송광사에서 중창불사의 완공을 기념하는 국제고승법회에서 “국제고승들은 ‘법’은 설하지 않고 모두가 하나같이 불사에 대한 의례적인 칭찬만 늘어놓”는다고 일침을 가한다. 또한 조계종 종정 추대를 놓고 종단 내부에 분란이 일어났을 때 “중 벼슬 닭벼슬만도 못하다”란 승가의 속담을 들어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일부 사판승들에게 일갈(一喝)을 던진다. 여기서 더 나아가 스님은 “한국불교의 폐단은(…) ‘깨달음’에 얽매여 깨달음의 행을 잃고 하루하루 세월만 헛되이 보내고” 있다고 사자후를 터뜨린다. 스님은 “다른 종교는 몰라도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부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우상이고 미신이다.”라고 단호하게 설파한다. 그러한 정신이 선가의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유구한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스님은 “나는 아마 전생에도 출가 수행자였을 것이다”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그는 6·25의 전흔이 채 가시지도 않은 1954년 효봉 스님을 은사로 삼아 출가했는데, 그의 출가변은 간단하면서도 당당하다. “나답게 살기 위해서, 내 식대로 살기 위해서.” 스님의 이런 생각은 매우 단호하다. 그는 『삼국유사』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설화를 인용하고는 마지막 줄을 이렇게 맺는다. “밤늦게 찾아오는 나그네가 있다면 그가 관세음보살 아니라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를 가차 없이 쫓아버리겠다. 예절을 모르는 보살과 부처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은 내 질서, 투철한 내 삶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스님의 이렇듯 철저한 주체성을 아집이라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님의 말씀이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그것은 남의 길을 따르지 말고 자기 길을 당당하게 가라는 뜻이지 포용심마저 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불일암에 찾아온 함석헌 선생께 밥이 아니라 고구마를 삶아드린 일과 그분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한 일을 후회하는 것도 그와 관련된다. 원칙도 중요하지만 때론 융통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스님은 “세상이 무상해서라거나 불교의 진리에 매혹되어서라거나 혹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출가했다는 말이 정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출가란 욕심을 버리는 것(離欲)이다. 그러므로 스님의 ‘무소유’ 사상은 출가 때 지녔던 초발심이 문자로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스님은 아끼던 난을 주변사람에게 준 뒤 즐겨 읽었던 책이 쌓이면 필요한 사람(곳)에게 나누고, 신도가 선물한 오디오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준다. 심지어 그는 “오늘 아침, 어제까지 받은 편지들을 부엌에 들어가 죄다 태”우기까지 한다. 봉은사 다래헌 시절에는 일꾼이 장미에게 제초제를 잘못 뿌려 죄다 죽인 광경을 목도하곤 “내 뜰에서는 절대로 꽃을 가꾸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는 김상진 신부가 준 책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을 읽으며 그들의 철저한 무소유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기도 한다. 그 책에는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너무도 우직하고 고집불통이고 기이한 일화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지만, 그 일화들의 행간을 통해 영원히 시들지 않는 꿋꿋한 구도자의 자세와 마주치”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사상은 요즘 한창 논의되고 있는 생태주의와 직접 통한다. 스님은 “자연은 인간에게 있어서 원척적인 삶의 터전이고 배경”이므로 “자연과 인간은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타종교에 대해 시비를 논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성경의 「창세기」에 나타난 정복의 사상에 대해서는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정복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라고 단호하게 비판한 것이나, ‘맑고 향기롭게’라는 시민운동단체를 결성하여 이끌어 온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스님의 생명사상은 개성적인 존재 가치,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생명유지의 오묘한 세계, 불교적 연기설에 얽혀 공생하는 존재, 다른 생명을 결코 죽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 발전 전개된다. (임헌영, 「법정수필에 나타난 생태적 상상력」)

법정 스님의 수필은 자신의 수행체험과 일상적 삶에 밀착해 있는 데다 쉽고 간결한 문체로 씌어져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스님은 해인사 장경각의 팔만대장경을 ‘빨래판’으로 보았던 할머니에게서 큰 깨달음을 얻고 어떻게 하면 불교를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 결과가 수십 권의 저작으로 표현된 것인데, 이제 스님은 당신의 육신과 함께 ‘말의 허물’도 거두길 원하셨다고 한다. 평생 무소유적 삶을 주장했던 스님으로선 당연한 말씀이겠으나 욕망과 집착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우리로서는 아쉽고 안타까운 심정뿐이다.

전생에도 현생에도 수행승으로서 곧은 삶을 살았던 스님께선 이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인이 되셨으므로 슬퍼할 일이 아니다. 평생 “어떤 틀에도 갇힘이 없이 그저 내 식대로” 살다 자유인이 된 스님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동국대 장영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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