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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상팔경 茶순례] ② 마원을 소생 시킨 명약, 뇌차(擂茶)

기자명 법보신문

찻잎 넣은 삼생탕은 열병 치료약이었다

 
소상팔경의 첫번째 경치인 ‘어촌석조’ 난간. 상덕 지역은 중국의 음다 풍속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군산에서 상덕(常德)으로 가는 길에는 동정호를 지난다. 호숫가로 수십만 평의 연 밭이 이어지는데 아스라이 보이는 연 줄기는 지난 해, 연향을 품었던 꽃대인지. 회색빛 연무가 연지(蓮枝)와 어우러져 일경을 이뤘다. 아마 이성(李成 919~967?)이 이런 풍경을 지나다 보았으면 필시 그는 소상팔경도에 일경을 더해 소상구경도(瀟湘九景圖)를 남겼을 터. 미불(米芾 1051~1107)의 감상기인 ‘소상팔경도시병서(瀟湘八景圖詩幷序)’ 후기에 이 일경의 감상기가 전하지 않는 것은 아마 절제된 자연미를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해서인가 보다.

상덕은 옛 도시로, 호남성의 서북부, 동정호 서안에 위치한다. 동한 때에는 무릉만(武陵蠻) 혹은 오계만(五溪蠻)으로 불렸던 곳. 원래 이곳은 토가족(土家族)이 살았던 지역으로, 『산해경』에 “서남쪽에 파국(巴國)이 있다. 동이족 태호(太)가 함조(咸鳥)를 낳고, 함조는 후조(后照)를 낳았는데 후조가 파국의 시조이다”라 하였다. 이들이 파인(巴人)의 후예라는 설은 여기에서 연유된 듯하다.

상덕으로 가는 길은 아직도 비포장 길이다. 군데군데 도로 포장을 위한 덩치 큰 장비들이 눈에 띄지만 비가 내린 탓으로 울퉁불퉁한 길은 이미 진흙탕이 되었다. 바로 눈앞에서 승합차가 진흙에 미끄러져 헛바퀴를 돌리더니 한 시간은 족히 지났는데도 움직일 줄을 모른다. 해는 이미 저물어 어둑어둑하다. 근처 마을에서 온 젊은이들인가? 손전등을 비추며 나타나더니 승합차는 이내 제 길을 떠났다. 죽 늘어섰던 차들도 하나 둘 가던 길을 재촉한다. 참 신기한 일은 이런 무질서 속에서도 나름대로 이들만의 질서가 있다. 소란한 다툼이나 길을 재촉하는 경적소리 하나 내지 않는 중국인들의 끈기와 대범함은 분명 대륙적인 근기와 유장히 흐르는 강에서 배운 미덕이리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중국만의 기이한 광경이다.

얼마를 지나니 중후한 노포(老鋪)의 노련미 넘치는 간판들에서 상덕이 구도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제법 규모가 커 보이는 노사다원(老舍茶苑)이 있고 간간히 크고 작은 찻집이 눈에 띤다. 점포마다 고졸하고 세련된 맛이 있어 여기가 차 문화의 발생지역인 옛 파촉(巴蜀)지역임을 수긍케 한다. 중국의 음다(飮茶) 풍속은 처음으로 이 지역에서 시작되어 수나라가 대운하를 개통한 후, 전역으로 퍼졌다. 남방에서 시작된 음다의 이로움이 뱃길을 따라 북방으로 전해진 것이다. 유통망의 확충은 상업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남방에 한정되었던 음다 풍속도 물길을 따라 확충되었다.

파촉의 음다 풍속 운하따라 전국으로

다음 날, 안개 속에 도착한 곳은 도화원(桃花園). 도연명(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의 의경(意景)을 재현한 것으로, 청대 광서 10년(1884)에 연명사(淵明祠)를 중수했다. 이 도화원은 ‘도화원기’에서 연유된 이상향, 신선이 사는 선경으로 은일자(隱逸者)라면 누구나 동경했던 무릉도원이다. 1447년에 제작된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1418~1453)이 꿈속에 집현전 학사들과 거닐던 도원경을 그린 것이라지만 이는 도연명의 ‘도화원기’의 고사에서 연유된 것이다.

도화원은 복숭아 꽃 핀 마을로 지상의 낙원을 상징한다. 복숭아가 불로약의 상징이 된 것은 위진시대에 “서왕모와 천도”라는 설화에서 연유된 것이다. 원래 서왕모는 불사약인 천도복숭아를 가진 신으로, 이 복숭아는 3000년에 한 번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 따라서 신선과 천도복숭아는 불로장생의 상징으로 동아시아에 널리 퍼졌다. 인간의 오랜 꿈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 것.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이며, 해결하고 싶은 욕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삼천년을 살았다는 동방삭의 장생도 자연의 이치에서 보면 한 바탕 꿈일 뿐이다.

“오두미(五斗米)의 녹봉 때문에 소인배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던 도연명(365~ 427)의 지조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며 지은 ‘귀거래사’에 고스란히 남았지만 불과 60여년을 살았던 도연명의 ‘도화원기’ 속의 이야기는 그가 그린 유토피아가 분명하다. 그의 ‘귀거래사’는 불후의 명작으로 “돌아가리. 전원이 황폐해지려하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고, 앞으로 일은 바른 길, 좇을 수 있음을 알았다네. 길을 잘못 들었으나 아직 멀리 가지는 않았으며 지금이 옳고 어제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네.”라 했던 그가 돌아간 곳은 도화원이 아니라 처자가 기다리는 자신의 고향이었다.

이곳의 다인이 차를 내는 모습.

한편 서동정 도원 무릉계에 위치한 “어촌석조(漁村夕照)”는 단애한 절벽 위에서 어촌의 저녁노을을 감상하는 곳으로 소상팔경 중 경승지이다. 고려시대 이규보(1168~1241)는 ‘어촌낙조’에서 순리와 관조미를 이렇게 노래했다.

지는 해 잔영이 있을 때는 빈 곳이 없거늘 어찌하여 유독 강 마을만 가리키는가.
취했다 깬 늙은 어부 고기 낚기는 늦었지만 천금의 가치에 해당하는 한 길의 붉은 빛 노을.
殘日明時無處空  奈何偏指水村中
漁翁醉起得魚晩 價値千金一丈紅

이규보는 저녁노을에 붉게 물든 강촌의 풍경을 천만금의 가치보다 귀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한 낮에 도착한 필자는 하늘과 강이 붉게 물든 낙조를 볼 수는 없었지만 연무 사이로 서서히 드러나는 푸른 물빛이 안개에 어려 만금도 아깝지 않을 희한한 장관을 연출한 경관을 보았다. 어떤 이가 “원숭이 울음소리 바람결에 끊어지고 어부의 노래 소리 달 아래에서 듣는다.(猿嘯風中斷 漁歌月下聞)”라 하더니 이곳엔 정녕 원숭이가 많단다.

더구나 이 지역은 후한 때 마원(馬援:BC14~49)이 오계만을 정벌하러 왔다가 열병으로 전사한 곳이다. 마원은 용맹한 장수이다. 한 때 왕망의 신하가 되었다가 후한의 광무제의 신하로 태중대부를 지냈던 인물. 이어 복파장군에 임명되어 교지(交趾: 북베트남)에서 봉기한 징측(徵側)의 반란을 토벌하고 낭박(浪泊:하노이부근)까지 진출했던 무장 중에도 용장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노령에도 불구하고 오계만을 토벌하려했던 그는 이곳에서 풍토병의 일종인 열병을 이기지 못했다.

도화원의 옛 비법이 뇌차의 원조

하지만 “어촌석조”를 감상하는 난간에 길게 소개한 글에는 이와는 다르다. 특히 후한 이전부터 원주민이던 토가족들이 약용으로 이용했던 차이거나 혹은 도가에 전해오는 비방약인 삼생탕(三生湯)이 소개되어 진귀한 고대의 차에 대한 자료를 얻었다. 이 자료에 의하면 “오계만을 정벌하러온 마원이 노상에서 열병을 얻어 많은 병사들과 함께 사경을 헤맸다. 이때 도화원에 사는 한 노인이 조상대대로 전해지는 비전인 삼생탕을 주어 소생하였다”는 것이다.

삼생탕은 생쌀과 날 생강, 그리고 생 찻잎을 나무통에 넣는다. 여기에 멀건 죽을 넣고 나무 봉으로 휘저어 껄쭉한 죽처럼 만든다. 이어 끓는 물을 부으면 황색의 탕이 된다. 이렇게 만든 삼생탕은 열병을 치료하는 약으로, 마원과 병사들을 소생시켰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도화원에서는 이 비방이 민간에 전해져 지금도 집집마다 항상 뇌차를 마신다고 한다. 삼생탕은 원시적인 차의 음용법을 잘 드러낸다. 제다라는 획기적인 방법이 나오기 이전에 차를 약용이나 음식으로 이용하던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러한 음다 방법은 당 육우(733~804)가 제다법과 탕법을 획기적으로 개량하기 이전, 파촉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것이라고 여겨진다. 수대의 대운하를 통해 전파된 이 시기의 차의 음용법도 이러한 유형에서 벗어난 것은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 시대 기록인 『광아(廣雅)』에 “형주와 파주에서는 잎을 따서 병차를 만드는데 쌀죽에 담갔다가 꺼낸다. 차를 마시려면 먼저 붉은 색이 될 때까지 불에 구어 분말을 만들어 자기 그릇 속에 넣고 물을 붓고 덮는다. 파, 생강을 넣어 마시면 술이 깨고 잠이 오지 않는다.”라 하였다. 따라서 삼국 시대에도 삼생탕처럼 마셨던 유형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으며 제다법이 조금 개량된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삼생탕은 뇌차라 부른다. 차의 음용 목적은 옛날부터 병을 치료하던 약용이었으며 음식과 약의 혼용 시기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현재와 같은 발전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순수한 차만을 이용해 차의 효능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당말 송대에 이르러서야 확립된 것이며 선종과 차의 융합이 후에야 철학적인 사유와 수행이 함의되어 정신 음료로 향상되었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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