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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이야기] 四相 남아 있으면 중생이요 없으면 부처

기자명 법보신문

번뇌 속에 있으나 생각 맑은 이가 보살
참되고 경계에 어지럽지 않은 것이 진여
깨달음 집착하는 法我 또한 버려야 滅度

3. 대승의 근본 뜻(大乘正宗分)

 
기림사 주변 차 밭에서 차 잎을 따고 있는 종광 스님.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다음과 같이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알에서 태어난 것이나, 태에서 태어난 것이나, 습기에서 태어난 것이나, 변화하여 태어난 것이나, 형상이 있는 것이나, 형상이 없는 것이나, 생각이 있는 것이나, 생각이 없는 것이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온갖 중생들을 내가 모두 완전히 열반에 들게 하리라.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한 열반을 얻은 중생이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보살에게 자아가 있다는 관념, 개아가 있다는 관념, 중생이 있다는 관념, 영혼이 있다는 관념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佛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 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 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 衆生相 壽者相 則非菩薩)

앞의 생각이 깨끗하고 뒤의 생각이 깨끗한 이를 일러 보살이라 합니다. 생각 생각이 물러섬이 없어서 비록 번뇌 속에 있으나 마음이 항상 청정한 사람을 또한 마하살이라 합니다. 마하살은 보살의 미칭(美稱)인데, 생각이 맑은 상태가 계속 유지되는 이를 일러서 보살마하살이라 부릅니다.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여러 방편으로 교화하는 이를 일러 보살이라 하고, 나와 대상에게 마음을 두지 않는, 즉 취착(取著)하지 않는 이를 마하살이라 부릅니다.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자(慈)는 사랑하는 마음, 비(悲)는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희(喜)는 함께 기뻐하는 마음, 사(捨)는 버리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같은 것을 두 개 이상 가지지 않는 것, 이것이 사(捨)입니다. 취착(取著)은 언젠가 가져야겠다는 마음입니다. 취착이 있으면 결코 마하살이 될 수 없습니다.

응여시항복기심(應如是降伏其心).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이런 뜻인데 마음을 조복 받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든 중생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응여시항복기심’의 여시(如是) 즉 ‘이와 같이’라는 말은 일체 중생을 공경하는 그 마음입니다. 또 참다운데 있는 것을 변하지 않음 [眞]이라 하고 같음과 합일함을 다르지 않다[如]고 하기 때문에 모든 경계를 만나서도 마음에 변화가 없는 것을 진여(眞如)라고 합니다. 모든 경계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六根)을 통해, 즉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끊임없이 보고 느끼는 대상들을 말하는데 이런 대상을 만나서도 중심이 잡혀있고 흔들림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여(眞如)에 이른 사람입니다. 밖으로 거짓되지 않는 것을 진(眞)이라 하고 안으로 한 생각도 어지럽지 않는 것을 또한 여(如)라고 합니다.

중생에는 난생(卵生), 태생(胎生), 습생(濕生), 화생(化生), 유색(有色), 무색(無色), 유상(有想), 무상(無想), 비유상(非有想), 비무상(非無想)이 있습니다. 난생(卵生)은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인데 이것은 미혹한 성품을 말합니다. 본성(本性)이 미혹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태생(胎生)은 습성(習性)입니다. 끊임없이 익혀온 성품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몸에 배어왔던 것을 가리킵니다. 습생(濕生)은 삿됨을 따르는 성품입니다. 요즘 선거철이 되니 점집에 가서 당락을 묻는 정치인들이 많아졌다는데 이것이 습생입니다. 삿됨을 따르는 성품입니다. 화생(化生)은 견취성(見趣性)이라고 하는데 보고 좋은 것만 쫓아가는 성품입니다. 우리말에 양지(陽地)만 지향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견취성입니다. 이익만을 쫓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미혹하기 때문에 업을 짓게 되고 익혀온 것 때문에 끊임없이 유전(流轉)합니다. 또 삿됨으로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분별심을 내어 좋은 것만 쫓는 까닭에 윤회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기심수심(起心修心)한다면 망견시비(忘見是非)라, 마음을 내서 마음을 닦는다고 하면 시비(是非)에 떨어져 안으로 무상(無相)의 이치에 계합하지 못함으로 유색(有色)이라 하고 마음속으로 참다움을 지킨다고 하지만 공경공양(恭敬供養)하지 않고 다만 마음이 부처라고 하는 생각만 가지고 복(福)과 지혜(智慧)를 닦지 않음을 무색(無色)이라 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불성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부처님과 같은 복과 지혜를 구족하지 못하면 내 안에 부처가 내재돼 있다하더라도 현현하는 부처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복과 지혜를 닦고 자비희사하고 일체 중생을 공양해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중도(中道)를 알지 못하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마음으로 생각하고 뜻으로 헤아려서 법상(法相) 즉 진리에만 집착해, 입으로는 부처님의 행(行)을 말하면서 마음으로는 그 행을 따르지 않는 것을 일러 유상(有相)이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좌선을 하는데 망상만을 제거하려고 하고 자비희사(慈悲喜捨)의 지혜 방편을 배우지 않아서 마치 목석처럼 아무 작용이 없는 것을 또한 무상(無相)이라 합니다.

파자소암(婆子燒庵)이라는 유명한 화두가 있습니다. 어떤 노파가 암자를 지어 20년 넘게 수행하는 스님을 잘 봉양했는데 하루는 그 스님의 수행 경계를 알기 위해 과년한 딸을 시켜 스님의 무릎에 앉게 하고 그 경계를 물어보게 합니다. 딸이 예쁘게 화장하고 스님의 무릎에 앉아 지금의 경계가 어떠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마른 나무가 찬 바위에 의지해 있는 것과 같다고 대답합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노파는 스님을 쫓아내고 암자에 불을 질러 버립니다. 무상(無相)에 대한 설명입니다. 대승불교의 요체이기도 합니다. 진리에만 집착하면 불교는 중생과 괴리되게 돼 있습니다.

유상(有相)과 무상(無相)의 두 가지 법상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비유상(非有相)이요. 이치를 구하는 마음이 있음으로 비무상(非無相)이라 합니다. 번뇌가 수 없이 많고 다르지만 하나같이 때 묻은 마음입니다. 몸의 모습들 한량없이 많지만 모두다 중생들입니다. 부처님께서 커다란 지혜로써 교화하시어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해 다 멸도(滅度)하게 하신 것은 삼계(三界)의 구지(九地) 중생에게 각각 열반의 묘한 마음이 있는 까닭으로 스스로 깨달아 한 가지도 남음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남음이 없다, 즉 무여(無餘)의 올바른 의미는 습기(習氣)와 번뇌(煩惱)가 모두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내 안에 내재돼 있는 중생적인 요소들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입니다.

또 열반(涅槃)은 원만청정(圓滿淸淨)입니다. 일체 습기를 모두 제거해서 영원히 생기지 않게 해야만 궁극적으로 열반에 계합(契合)하게 됩니다. 도(度), 즉 건넌다는 것은 생사의 고해 바다를 건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마음이 평등해서 일체중생과 함께 원만 청정한 무여열반에 들어서 생사의 대해를 건너 부처님께서 얻으신 것과 똑같은 깨달음을 증득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깨닫고 수행하더라도 내가 깨달았다. 내가 공부한다. 내가 안다 하는 소득심(所得心)을 내면 도리어 아상(我相)에 떨어지게 되니 이를 법아(法我)라 합니다. 이 법아마저도 다 없애야 비로소 멸도(滅度)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멸도는 대해탈(大解脫)인데 이유는 습기와 일체 업장이 모두 소멸돼 일체 남음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한량없는 중생이 원래 각각 일체 번뇌(煩惱), 탐진(貪嗔), 악업(惡業)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끊지 못하면 마침내 해탈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 까닭으로 육조 스님께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무량무수무변(無量無數無邊) 중생을 멸도하게 해야 된다.’ 라고 한 것입니다. 미혹한 사람들이 자성(自性)을 깨닫게 되면 비로소 부처님이 스스로의 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지혜 또한 남겨 두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이치를 안다면 어찌 부처님께서 일찍이 조금이라도 중생을 제도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한다, 제도하지 않는다는 생각 자체를 갖고 있지 않으며 다만 중생에 내재돼 있는 부처가 현현되도록 하실 따름입니다. 가려진 햇빛이 구름이 걷히면 그대로 나타나듯이 불성 또한 일체 습기를 제거하면 스스로 현현하면 됩니다.

다만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모습에 집착한 까닭에 무위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나와 너라는 분별을 없애지 못함으로 이를 다만 중생이라 이르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병만 버리게 되면 실로 중생을 멸도 할 것 조차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망심(妄心)이 없는 곳이 곧 보리(菩提)요.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본래 평등하다.’ 라고 한 것입니다. 생사를 떠나 열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떠나 극락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중생(衆生)과 불성(佛性)이 본래 다르지 않지만은 사상(四相)이 있음으로 해서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가지 못함이니 사상이 있으면 중생이요, 사상이 없으면 곧 부처입니다. 미혹하면 부처가 바로 중생이요, 깨달으면 중생이 곧 부처입니다. 미혹한 사람은 재산, 학문, 가문을 믿고 일체의 사람을 가볍게 여기고 업신여기는 것으로 이를 아상(我相)이라고 합니다. 비록 보시(布施)와 자비희사(慈悲喜捨)를 하지만 자부심이 높아서 널리 중생을 공양 공경하지 않는 것이 인상(人相)입니다. 좋은 일은 자신이 차지하고 나쁜 일은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을 중생상(衆生相)이고 경계를 대해서 취사선택하는 것을 수자상(壽者相)이라 하는데 이를 범부(凡夫)의 사상(四相)이라고 합니다.

수행하는 사람에게도 사상(四相)이 있습니다. 마음에 분별이 있어 중생을 가볍게 여기는 것을 아상(我相), 스스로 수행을 잘 하다고 해서 수행하지 않는 사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을 인상(人相), 삼악도를 싫어하고 천상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는 것을 중생상(衆生相), 오래 살기를 발원해서 부지런히 복업을 닦아서 오히려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수자상(壽者相)이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상(四相)이 남아 있으면 중생이요. 사상이 없으면 곧 부처입니다. 〈계속〉

종광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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