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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이야기] 일체 모습 허망함 알면 참 부처님을 보게 되리라

기자명 법보신문

크고 밝은 무한량의 부처님이 법신여래
법신여래 발현 방편으로 색신여래 필요
법신여래는 지혜의 눈으로만 볼수 있어
반야바라밀행 닦게 되면 법신여래 현현

5. 여래의 참모습(如理實見分)

 
법문을 하기 전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종광 스님.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여래라고 볼 수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여래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신체적 특징은 바로 신체적 특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체적 특징들은 모두 헛된 것이니 신체적 특징이 신체적 특징 아님을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身相 見如來不 不也世尊 不可以身相 得見如來 何以故 如來所說身相 卽非身相 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 非相 則見如來)

색신(色身)은 모습 있는 것이고 법신(法身)은 모습이 없는 것입니다. 색신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대(四大)가 모여서 이뤄진 것으로 부모님의 몸을 통해 생긴 우리의 몸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육안(肉眼)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형상이며 모습입니다. 그러나 법신은 형체가 없습니다. 파란색, 노란색, 붉은색, 흰색 등 어떤 색도 없으며 형태나 모습도 없습니다. 당연히 육안으로 볼 수 없겠지요. 그래서 지혜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 범부는 색신여래만을 보고 법신여래는 보지 못합니다. 법신의 크기가 허공과 같은데 미혹한 우리는 혜안이 없기 때문에 법신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질문을 하시되 몸의 모습으로 과연 여래를 볼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수보리 존자는 범부는 지혜가 없어 색신여래만 보고 법신여래를 보지 못함을 알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몸의 모습으로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법당에서 부처님을 친견합니다. 물론 우리가 친견하는 부처님은 불상으로 조성된 부처님입니다. 불상을 조성할 때 나름대로의 법식에 따르고 있지만 어찌됐든 부처님의 모습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 조성, 우리가 이상적이라고 생각되는 모습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습이 진짜 부처님의 형상은 아닌 것이지요. 그렇다면 진짜 부처님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우리가 흔히 보는 불상처럼 고정된 어떤 형태나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불상을 조성하는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습으로 형상화 한 부처님을 매개로 진정한 부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노력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부처님. 참 부처님이 바로 법신여래입니다. 어떤 것보다 밝고 맑고 큰, 그래서 무한량한 부처님, 이것이 법신여래입니다. 그런데 법신여래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우리 안에 내재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 내재돼 있는 법신여래를 발현시키기 위해서 방편으로 색신여래의 모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법당에서 불상으로 조성된 색신의 부처님을 향해 예배를 하고 기도하고 하는 것은 나를 끊임없이 낮춰서 법신여래가 더 가까이 현현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나를 낮추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공경하고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내 안에 내재돼 있는 법신여래가 거듭 거듭 현현하게 됩니다. 모습으로 부처님을 보지 말라는 말씀의 뜻은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색신이라고 하는 것은 모습이고 법신이라고 하는 것은 본성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일체의 선악(善惡)은 법신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색신으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법신이 악(惡)을 지으면 색신은 선(善)한 곳에 태어날 수 없으며, 법신이 착한 일을 하면 색신이 악한 곳에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범부는 오로지 색신만 보고 법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능히 상(相)이 없는 보시를 행하지 못하며 능히 어느 장소에서나 평등한 행을 행하지 못하며 능히 일체 중생을 널리 공경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신을 보는 자는 능히 상에 치우침이 없는 보시를 하게 됩니다. 능히 일체 중생을 널리 공경하며 능히 반야바라밀을 닦게 됨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동일한 참된 성품을 지녀서 본래 청정하고 더러움이 없게 됩니다. 법신이 강가강의 모래알 같은 셀 수 없이 많은 신묘한 작용을 갖추고 있음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따른다면 법신여래가 갖고 있는 공덕이 바깥으로 자꾸 나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상에 걸림이 없는 보시를 해야 하고 어떤 장소에서나 치우치지 않는 평등한 행을 행해야 합니다. 또 일체 중생을 공경하고 반야바라밀을 닦아야 합니다. 이것이 법신여래를 바로 공경하는 길입니다.

여기서 상에 걸림이 없는 부주상(不住相) 보시는 무엇일까요. 지난 시간에 함께 공부를 했는데 어려울 것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떠한 조건도 없이 남과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부주상 보시입니다. 절에 가서 불사를 하는 것만이 보시는 아닙니다. 이웃을 위해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도 훌륭한 보시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도 아름다운 보시입니다. 주위의 몸과 마음이 불편한 사람 있으면 그 불편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행동, 그것이 보시입니다. 이런 부주상 보시를 통해 법신여래는 현현하게 됩니다.

금강경에서는 초지일관 부처님께서 당부하고 계신 말씀이 있습니다. 일체 모든 중생을 널리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일체 중생을 널리 공경하려면 스스로를 낮아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낮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예배하고 기도하고 참선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절을 찾아 부처님을 공경하고 공양하고 예배하는 것은 색신을 낮추려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에게 내재돼 있는 법신여래가 비로소 현현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부처님을 친견하고 예배하고 나면 그만큼 낮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아만만 쌓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히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좌상이라는 사상(四相)의 덫에 빠지는 것입니다. 공덕을 쌓는 것과 전혀 반대가 될 뿐 아니라 법신여래의 현현 또한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고 절을 하면 그 결과로 반드시 스스로를 끊임없이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일체 중생을 공경하게 되고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이치를 알게 되면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을, 능력을 이웃을 위해 조금씩 쓰는 것, 그것이 또한 아름다운 반야바라밀입니다.

자, 다음은 금강경의 그 유명한 사구게(四句偈)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체적 특징들은 모두 헛된 것이니 신체적 특징이 신체적 특징 아님을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佛告須菩提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 非相 則見如來)

사구게에는 금강경의 핵심이 녹아있습니다. 여래의 참모습을 보는 이치, 한발 더 나아가 공(空)의 이치를 깨닫는 도리를 밝혀 놓았습니다. 그래서 불자들에게 더욱 중요한 게송이기도 합니다.

여래께서는 법신을 보여주고자 하는 까닭으로 눈으로 보이는 모든 모습이 허망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모습 있는 것이 허망한 것이라는 이치를 깨닫게 되면 여래의 모습이 없는 이치를 알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신체적 특징이 모두 헛된 것이니 신체적 특징이 신체적 특징이 아님을 본다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습을 꾸미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합니다. 색신을 치장하는 데는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는 말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내면을 위해 투자에는 그리 많은 시간은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거울에 비치는 그 형상은 참다운 나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 거울에 비치는 우리의 육신은 허망하고 헛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무상함에 휘말려 결국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참다운 나는 무엇입니까. 내재돼 있는 불성입니다. 그 불성이 바로 법신입니다. 지금 보이는 내 모습이 모두 헛된 것이니,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본다면 바로 법신인 불성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법신을 현현시키는 방법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낮추며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예배하고 참선하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낮추고 뭇 중생들의 작은 고통에도 귀 기울이는 것, 이것이 반야바라밀의 실천입니다. 만약 지금 마음에 선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일고 있다고 그것이 반야바라밀의 시작이며 곧 법신의 현현입니다. 〈계속〉

종광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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