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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신심명] 35. 죽음을 명상함

기자명 법보신문

삶은 존재의 출현이고 죽음은 은적
삶과 죽음, 존재 이중성으로 읽어야

오늘은 지난 회의 글을 다시 쉽게 풀어 쓴다. 승찬대사가 말한 믿는 마음은 보이는 현상(色)과 안 보이는 실상(空)이 둘이 아님을 믿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생명(현상=색)은 몸을 빌려 나타남이요, 우주의 모든 죽음(실상=공)은 몸을 떠나 사라짐이다. 사라진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 회에 생명의 현상은 생명의 출현이고, 죽음의 실상은 생명의 은적(隱迹=숨음)에 비유되었다. 죽음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개체로서의 몸이라는 존재자를 존재가 떠나는 것이다.

기독교가 죽음을 넘어선 영생의 개념을 사용하나, 이것은 죽지 않는 영원한 몸을 소유하겠다는 발상이다. 기독교는 철두철미 명사적인 존재자중심의 사상, 소유의 철학에 불과하다. 더구나 이것은 결코 예외가 없는 대자연의 필연성과 그 이법에 어긋난다. 기독교는 확실히 존재자중심론에다가 인간중심주의의 두터운 외곽 속에 갇혀 산다.

불교적인 의미에서 죽음은 명사적인 존재자중심의 집착을 끊는 계기가 된다. 물론 존재자가 없는 존재의 사유는 불가능하다. 모든 존재의 사유는 존재자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구름이란 존재자가 없이 구름의 존재는 현실화되지 않고, 인간이란 존재자가 없이 역시 인간의 존재는 사유되지 않는다. 존재자는 존재를 가리키는 방편이다. 그러나 그동안 사람들은 구름이나 인간 등과 같은 존재자 위주로 생각을 고착시켜 왔었기 때문에, 구름의 존재나 인간존재를 망각해 왔었다.

구름과 인간이 무엇인가 물으면, 사람들은 제각기 아는 만큼 답할 것이다. 그러나 구름과 인간의 존재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황당하게 생각하고 말하기 어렵다고 말하겠다. 답변의 압력을 가하면, 사람들은 그냥 그것들이 시간의 장단은 있으나 생겼다가 사라지고 또 생겼다가 사라지는 사건이라고 말할 것이다.

구름과 인간이 생겼다가 사라지고 또 생겼다가 사라진다. 그것은 마치 꽃이 피고 지고, 또 피고 지고 하는 반복과 같다. 구름, 인간, 꽃 등의 존재가 물질을 잠시 빌리고 또 떠나는 것과 같다. 존재가 물질을 빌려서 자기의 존재를 존재자처럼 보여주고, 다시 숨기 위하여 그 물질의 옷을 벗는 것과 같다. 존재가 물질(色)을 빌리는 것은 그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가 물질을 통하여 다양하게 자기의 존재방식을 느끼게 하기 위함이다.

죽는다는 것은 존재가 물질적 몸을 떠나 물질적 방편을 초탈하는 것이다. 이 초탈을 몸을 가진 우리는 사라지고 숨는 것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은적의 의미다. 은적의 행위로서의 죽음을 우리는 하이데거의 표현을 따라서 ‘무(無)의 성궤’ 속으로 들어감이라 부른다. ‘무의 성궤’는 초탈의 영역이고, 해탈로서의 대자유의 영역이고, 무진장의 에너지를 간직하고 있는 영역이다. ‘무의 성궤’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죽음을 기독교에서처럼 죄와 저주로 여겨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죽음은 모든 아픔을 잊어버리게 하는 진통제도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필연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삶과 죽음을 존재의 이중성으로 읽어야 한다. 삶이 존재의 출현이라면, 죽음은 존재의 은적에 해당한다. 죽음은 존재자의 파괴이지만, 존재의 소멸을 말하지 않는다.

죽음은 존재자를 떠난 존재의 침묵을 말한다. 그 침묵은 방송중단 사고처럼 조잘대는 말하기가 고장난 것이 아니라, 말의 깊이를 솟아나게 하는 마음의 고요와 다르지 않다. 깊이 없는 정치꾼들의 말과 그 범람이 존재의 은적인 무(無)와 공(空)을 무의미하다고 지운다. 이와 함께 죽음을 늙은 폐품처리의 순간으로 여긴다. 죽음이 폐품화되면, 삶도 싸구려 상품의 전시장으로 끝난다. 〈끝〉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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