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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江에서 달을 보다] 조계종 포교원장 혜총 스님

어제 지은 업 잊지 말고 오늘 참회하라

서른 못 넘긴단 스님 말에
11세 통도사로 동진출가

자운 스님 40년 동안 시봉
선지식 두루 만났으니 ‘복’

재가불자들과 함께 지체부자유 보호시설을 방문한 혜총 스님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손발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고, 말 한마디 제대로 발음할 수 없는 아이들을 보고 있는 순간 가슴 저 밑에서 밀려오는 측은함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의 이러한 행동이 어린 아이들에게 말없는 위로와 용기를 건넨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공양시간 전까지는 말이다.

혜총 스님도 아이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아니, 이런! 아이들의 공양 모습을 면전에서 처음 본 스님은 놀랐다. 한 술 뜬 밥의 반은 흘리고, 나머지 반도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코 묻은 밥 그대로 입에 넣는 아이들이 다반사였다.

욱! 순간 역겨웠다. 동행한 재가불자들이 스님을 쳐다보았다. 낯이 불거졌다. 감로사로 돌아 온 혜총 스님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이들이 아닌 자신을 향한 눈물이었다.

‘나는 자비를 나눈 게 아니라 동정만 하려 했구나. 아니, 그 동정마저도 진실 되지 못했구나. 내가 낳은 아이라도 그러했을까! 가식이다.’

참회의 눈물을 흘린 스님은 서원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의 자비심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에 다가갈 것임을 말이다. 이 때 혜총 스님은 포교의 진정한 의미는 일반인을 불자로 만드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법을 전하는 것이라는 나름의 포교철학을 세웠다.

1986년 사단법인 ‘동련’이 출범하면서 혜총 스님의 본격적인 포교 발걸음이 시작됐다. 대한불교어린이지도자연합회를 맡은 혜총 스님은 1994년 복지법인 불국토까지 이끌며 부산 지역의 새로운 포교지평을 열었고, 1989년에는 조계종 포교대상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4년 북한의 용천참사 사건이 발생하자 부산 참여불교운동본부를 통해 ‘통일신발’ 보내기에도 적극 나서며 북동포 돕기에도 남다른 노력을 쏟아 부었다. 부산 동명대학교 불교대학에 불교문화학과를 개설하는 데에도 일조했다.

1953년 세납 11세 때 양산 통도사로 입산해 보경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자운 스님을 40여 년간 시봉했다. 자운 스님은 15세에 이미 사서삼경을 모두 익힌 후 27세 되던 해 탁발 나온 혜운 스님으로부터 순치 황제의 출가 시 한 토막을 듣고 홀연히 집을 나와 해인사 팔만대장경에서 3000배를 올린 후 혜운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은 대종사다. 청담, 성철 스님 등과 함께 문경 봉암사에 특별수행도량을 설립하며 한국불교의 중흥을 서원한 자운 스님은 백팔참회, 능엄주 독송, 조석예불 등의 조계종의 수행의례를 쇄신했다. 무엇보다 계율사상을 진작시킨 자운 스님은 ‘자기성찰’의 중요함을 설파하며 자비도량참법을 간행, 유포해 참회정진 수생을 권장, 토착화시키기도 했다.

자운 스님이 혜운 스님으로부터 들은 순치 황제의 출가 시 한 토막은 이렇다.
‘백년 삼만 육천 날이 승가에서의 반나절 쉼만 못하네(百年三萬六千日 不及僧家半日閒)’
혜총 스님 역시 어느 스님이 전한 일언을 듣고 출가를 결심했다.
“서른을 넘기기 어렵다. 이를 피할 길은 출가 외엔 없다.”

순치 황제는 ‘쉬기’ 위해 출가했지만 혜총 스님은 ‘살기’ 위해 출가했다. 혹여, 대율사를 시봉하는 일이 고되지는 않았을까? 이에 혜총 스님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제가 시봉 받았지요.”
손상좌가 시봉을 받았다니 무슨 말인가?
“코 흘리게 코 닦아주시고, 양말에 구멍 나면 꿰매주시고, 때 되면 밥 주셨으니 제가 시봉 받은 셈이지요.” 자운 스님으로부터 입은 큰 은혜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성철, 향곡 스님도 ‘어린 혜총’을 보면 “씨름 한 판 하자”며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본격적인 시자생활에 접어들어서도 혜총 스님은 고된 줄 몰랐다고 한다. 오히려 자운 스님을 시봉하며 당대 선지식을 모두 만났으니 ‘복 중의 복’을 받은 것이라 술회한다. 자운 스님의 뒤를 따라다니기만 해도 ‘큰 공부’를 ‘공짜’로 한 셈이다. 그러나 선지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직접 보고 있다 해도 스스로 묻고 가름하지 않으면 헛일이다.
어느 날 자운 스님이 『화엄경』을 보고 계셨다. 시자 혜총이 아는 바로는 스님은 이전에 『화엄경』을 모두 보셨다. 다시 『화엄경』을 펼친 자운 스님에게 여쭈었다.

“스님, 보신 『화엄경』은 왜 다시 보십니까?”
“다른 『화엄경』이지.”
“『화엄경』이 다 똑 같지 다를 게 있습니까?”
“같은 『화엄경』인데 달리 보인다. 혜총도 훗날 알 것이다.”
혜총 스님은 이 일을 너무도 명확히 기억하고 있다.
“어느 때 이르니 『금강경』이 새롭게 보이더군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한마디도 어제, 오늘 와 닿는 느낌이 다릅니다. 한 우물에서도 매일 새로운 물이 차오르듯, 똑 같은 『금강경』인데 항상 신선한 법설로 다가옵니다.”
운허 스님 문하에서 『능엄경』을 수학할 때였다. 운허 스님은 길가에 핀 꽃을 보시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너무 좋아 보여 옆에 다가가자 운허 스님이 한 말씀 했다.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음씨가 곱다.”

해인사로 돌아 온 혜총 스님은 수 십여 개의 화분을 들였다. 어느 날 자운 스님과 함께 며칠 동안 출타한 후 돌아와 보니 대부분의 꽃이 말라 죽어 있었다. 자운 스님이 한마디 던졌다. 준엄함이 배어 있는 꾸중 섞인 일갈이었다.

“너는 꽃을 사랑하느냐?”
“예.”
“꽃도 너를 사랑하느냐?”
“….”

중국의 현사 스님도 그러했다. 현사 스님이 하루는 밖에 나갔다 돌아오니 제자가 방 한 켠에 꽃을 꺾어 놨다. 이에 현사 스님이 물었다.
“무슨 꽃이냐?”
“산에 핀 꽃이 너무 아름다워 꺾어 왔습니다.”
“꽃도, 네가 꽃을 좋아하는 만큼 좋아하느냐?”
“….”

혜총 스님이 통도사로 출가하자마자 한 일은 ‘3000배’였다. 11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자운 스님에게 여쭈었다.
“스님, 왜 3000배를 해야 합니까?”
“참회를 해야 한다.”
“참회라니요?”
“죄를 지었으니 뉘우쳐야지.”
“저는 죄 안 지었는데요.”
“너는 아직 어려서 모른다. 3000배 하면 후에 큰 이익이 있을 것이다.”

어린이-청소년 포교 새 장
포교란 ‘법’ 전하는 것일 뿐

꽃-풀 한송이도 제대로 보면
증득의 한 과정으로 작용해

혜총 스님은 매년 2000여명의 재가불자들과 함께 ‘3000배 참회기도법회’를 열고 있다. 포교원장을 맡은 후 지난 2년 동안 재가불자들과 함께 이 법회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고 있다. 사실 감로사 3000배 참회기도법회는 6·25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부터 시작됐다. 부처님 출가일에 앞서 자운 스님을 비롯한 성철, 향곡, 석암, 월하, 지관, 일타, 월산, 청담, 운허, 영암, 벽암, 법전 스님 등 당대 내로라하는 스님들이 감로사에 모여 국난극복 의미를 담은 참회기도법회를 열었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감로사 3000배 참회기도법회는 반세기의 역사를 쓰고 있다.

“자운 큰 스님 말씀대로 어려서는 몰랐지만 후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군요. 저만 해도 개구리 잡는 일은 다반사였지요. 그 뿐입니까? 메뚜기나 잠자리 잡아 장난치다 식상하면 닭 모이로 던져 주었습니다. 모르고 한 일이지만 참회해야지요. 세상 살며 참으로 많은 업을 짓습니다. 남의 물건 훔치는 일만 참회하는 게 아닙니다. 거짓말로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도 한 일도, 본의 아닌 실수라도 그 일로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그 역시 참회해야 합니다. 참회는 수행의 첫 걸음이면서 이생을 마칠 때까지 해야 할 일이 또한 참회입니다.”

혜총 스님은 여건이 닿는다면 해외불교에도 눈을 돌려보라 권한다. 또한 불서 뿐 아니라 다른 분야의 책도 부지런히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항상 ‘왜?’라는 물음을 던져보라 한다. 자운 스님은 해외여행이 어려운 6·70년대에도 남방불교는 물론 유럽과 미국을 다녀 온 스님이다. 시자인 혜총 스님이 자운 스님의 해외 길에 함께 한 듯 싶었지만 실은 정반대였다.

“자운 스님은 틈만 나시면 저에게 해외에 나가 보라 권했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한국도 좋은데 굳이 해외에 나가서까지 볼게 뭐 있습니까?’라며 반문만 했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자운 스님은 입적 전에 혜총에게 일렀다.
“혜총! 해외여행 많이 다녀와라.”
“왜 자꾸 가라하십니까?”
“금생도 좋지만 내생도 좋다.”
순간, 혜총 스님 뇌리에 번뜩이는 섬광이 지나가는 듯했다. 해외여행을 통해 견문을 넓히라는 뜻도 있었지만 더 깊은 뜻이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증득이란 지혜를 통해 진리를 깨달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참선이나 염불 등의 수행을 하는 것도 증득하기 위함이고, 경을 보며 그 속에 담긴 요지를 헤아려 가는 것도 증득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사물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사유해 보는 것 또한 증득의 한 과정입니다. 내가 보고 듣고 한 모든 경험이 증득의 한 과정 선상에 놓여지는 겁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해외에서 ‘뭐 특별히 볼게 있겠느냐’고만 했던 저는 이미 단견에 떨어진 겁니다.”
화두를 들듯, 염불을 하듯, 깨어 있는 그 정신과 마음으로 세상을 한 번 보라는 뜻일 것이다. 그 속에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부처님 말씀이 새겨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출가직후의 3000배도, 꽃을 곁에 두기만 하면 ‘좋은 마음을 내는 사람’이라 보일 것이라는 사심도, 『화엄경』은 다 똑같다 말한 우매함도, 공양자리에서 느꼈던 자신의 가식도 혜총 스님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참회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다시 새로운 원력을 세우고 그에 따른 새로운 지혜를 발현해 갔다. 혜총 스님은 우리에게 불망지(不忘知)를 설파하고 있는 듯하다.

전생의 일은 누구나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어제 일도 잊고, 오늘 아침에 핀 꽃 한 송이도 그냥 지나치고 있지 않는가. 번뇌망상 때문이리라. 이래서는 자기성찰이나 회광반조는커녕 참회의 기회마저 얻지 못하고 이생을 마칠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윤회에 대해 한마디 일러 달라 청했다.

“동쪽에서 뜨는 해와 서쪽으로 지는 해를 보며 말합니다. 매일 해는 뜨고 진다고…. 그러나 지구 밖 우주에서 볼 때 해는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
깊이 사유해 볼 대목이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혜총 스님은

1953년 통도사로 동진출가해 보경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후 1963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해인사, 범어사승가대학, 동국대 불교학과 졸업 후 1974년 동국대 불교대학원 석사과정 수료했다.

현재 사단법인 불국토 상임이사, 사회복지법인 불국토 이사장, 사단법인 동련 총재, 조계종 포교원장을 맡고 있다. 국민훈장 동백장, 조계종 포교대상 공로상, 조계종 종정 표창패, 국무총리 표창패를 수상 했다. 저서로는 『꽃도 너를 사랑하느냐?』, 『새벽처럼 깨어있으라』, 『아미타불예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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