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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은 조선불교 용광로”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10.07.19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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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고영섭 교수 건봉사세미나서 주장
왕실 원당 기능…18세기 사찰 125개 존속

조선후기 금강산 사찰은 불교신앙과 수행전통의 용광로라는 주장이 나왔다.
고영섭〈사진〉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는 고성 건봉사가 7월 10일 건봉사에서 개최한 학술세미나에서 “금강산은 전국에 산재하는 조선의 모든 신앙을 이 지역에 특화시킨 불교신앙의 집중처이자 종교신앙의 모음체”라고 평가했다.

이날 ‘금강산의 불교신앙과 수행전통’을 발표한 고 교수는 조선 정부의 강력한 억불 정책 속에서도 금강산 사찰들이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를 비롯해 조선시대 금강산 지역 소재 사찰수의 변화 및 특성에 대해 고찰했다.

고 교수에 따르면 숭유억불 정책 아래 전국의 불교 사찰들이 ‘구조조정’되기 시작한 조선조에서도 금강산 사찰들이 일정한 사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주된 원인은 이곳 대사찰들이 왕실의 원당으로 자리매김되었기 때문이라는 것. 세조가 지정한 사찰 10곳 중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 건봉사 등 4곳이 금강산에 있었다는 점도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사례 중 하나로 제시했다.

고 교수는 특히 조선시대 금강산 사찰 수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당시 절의 이름도 각각 명시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실록, 지리서, 유산기(遊山記) 등에 대한 문헌 검토를 통해 조선초 금강산에서 확인되는 사찰의 이름이 180여 곳에 이르다가 16세기 90곳으로 줄고, 18세기에는 125개로 다시 크게 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고 교수는 조선후기 다른 지역과는 달리 금강산에 절이 늘어난 배경에 경절문(선), 원돈문(화엄), 염불문의 ‘삼문수학(三門修學)’이 확립되기 시작하면서 불교 교단이 나름대로 구심을 회복한 점을 들었다.

고 교수는 또 당시 금강산에 불교의 모든 신앙이 다 들어와 있음에도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담무갈 보살의 상주처로 비정된 화엄신앙 뿐 아니라 관음과 미타 및 지장과 미륵신앙도 들어와 있었다.

그중 표훈사는 원돈문에 입각한 화엄도량과 화엄수행체계의 전통이 서려있고, 유점사는 경절문에 입각한 참선도량과 화엄수행체계의 전통을 겸비하고 있었다. 또 신계사는 경절문에 입각한 참선도량을 유지하면서도 아미타도량으로서의 기능을 아울러 갖고 있으며, 건봉사는 염불문에 입각한 미타도량을 유지하면서도 강학전통을 지녀오고 있는 등 금강산은 모든 불교신앙의 집중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조선후기 이후 불교수좌들은 금강산 마하연 선방에서 한 철 나는 것을 전통으로 삼아왔을 정도로 신앙과 수행에 대해 남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점도 금강산의 특징으로 꼽았다.

고 교수는 “금강산은 통일신라 이래 불교의 성지이자 한민족의 성지가 되어왔다”며 “금강산이라는 공간은 척박한 조선조 불교의 지형에서 수행 전통이 드물게 살아있는 독자적 지점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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