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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 충실해야 2등 면한다

기자명 은정희
몇 년 전 성철선사상연구원의 백련아카데미 주최로 한문 경전의 번역에 대하여 발표한 일이 있다. 그 때 한 대학원 학생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것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발표자의 주장대로라면 한문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십수년의 세월을 허비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즉 그 많은 세월을 한문에 쏟아 붓는 것은 어리석고 하기 힘든 일이라는 뜻이었다. 이야말로 현재 우리나라 학문하는 사람들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십수년이 아니라 일생을 던져도 부족하게 여기는 구도자적인 마음가짐으로 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루어 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요즘 여기 저기서 불교사상에 관련된 연구소가 생겨나고 연구업적이 지속적으로 그리고 비중 있게 쌓이기 위해서는 탄탄한 기초작업이 선행돼야 하며 그러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탄탄한 기초작업이 없이는 일회 또는 단기에 그치고 마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나 휴대폰 등 수출이 꽤 활발하여 우리 외화수입에 상당한 도움을 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자동차나 휴대폰에서 그 핵심 되는 기술적인 부품은 미국 또는 일본 것을 사들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그러니 수출해 보았자 미국·일본에 부품료를 지불하고 나면 별반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미국이나 일본 사람들보다 머리가 나쁜 것은 결코 아니다. 빛 안나고 힘든 기초 과정을 무시하거나 생략하고 번지르르 한 결과만을 추구하다 보니, 언제나 이등국가를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현시적인 결과물만을 중시하고 그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힘든 노고의 과정을 회피하는 풍조가 지속된다면 그 결과물도 결국은 별 볼일 없는 것이 될 것임은 너무나 뻔한 것이다.

우리 불교학계만 해도 뼈를 깎는 기초작업에 매달리기보다는 주로 일본 등지의 결과물을 수용하기에도 급급한 현실이다보니 저들보다 나은 저술 내지는 학문적 성과를 내놓기가 힘들게 되었다. 한 예로 일연의 좬삼국유사좭는 우리나라에서 번역된 것이 수십 종이 있으나 한결같이 주석이 거의 없다. 오직 일본인 삼품창영(三品彰英)과 촌상사남(村上四男)의 것만이 상세한 주석이 붙어 있다. 결국 일본인 학자의 수준을 능가하지도 아니 따라가지도 못하다는 얘기다.

재작년 모 불교학회 세미나에서 발표를 하는 사람이 한문 원문의 뜻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오자(誤字)가 있는 채로의 원문을 인용하고, 그 결과 말도 안되는 얘기를 뻔뻔하게 늘어놓은 사례를 접한 일이 있다. 놀랍게도 그것이 박사학위 논문을 축약한 것이라고 하니 더 할말이 없었다. 학문에 있어서나 기술발전에 있어서나 그러지 않아도 이처럼 기초작업을 소홀히 하는 풍토가, IMF가 터진 이후 오직 경제 제일주의의 목표 하에 더 심화되고 게다가 인문학 분야는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곤두박질치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이러고서도 우리가 오천년 문화민족임을, 위대한 원효의 후예임을 내세울만한 자질이 정말 있는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하기야 이런 한심한 사태는 불교학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학계 전체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오로지 입시학원으로 전락해 버린 요즘, 우리나라의 교육풍토 때문에 교육이민을 가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제기되고 있는데, 이 기회에 총체적인 그리고 근본적인 교육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 개혁의 중심축은 인문학분야든, 또는 과학이든 ‘기초공사’를 튼튼히 하는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 그나마 이등국민을 당장 벗어나지는 못하나마 내 나라 선현들의 학문적 업적만이라도 제대로 발굴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은정희 (서울교육대 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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