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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 스님 다삼매를 찾아] 1. 연재를 시작하며

기자명 법보신문

길 위에서 차의 의미와 수행자로서 고뇌를 묻다

스님 남긴 시문·편린들과
당대 문인들 자료 토대로

초의 스님 탁견과 이상
수행자로서의 면모 조명

 
초의 스님이 40여 년 머물렀던 해남 일지암.

올해로 차를 만들고 연구한지 삼십년이 되었으니 한 세대를 훌쩍 넘긴 셈이다. 그동안 모은 자료를 토대로 초의(草衣, 1786~1866) 스님의 차에 대한 연구도 한편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완성했다. 이제 비로소 차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단계가 아닌가 싶다.

초의 스님의 차에 대한 논문을 끝낸 후 그와 인연이 있는 곳을 따라 꼼꼼히 현장을 답사해 보고 싶었다. 19세기 초의 스님이 살았던 시기와 지금은 많은 변화를 거치는 동안 그와 인연이 있었던 곳도 지형이 변화하고 사람도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산하는 여전히 옛 모습 그대일 터. 비록 주변의 지형이 바뀌고 건축물이 달라졌다하더라도 그가 걸었던 길 위에서 대지가 들려주는 자연의 숨결을 듣고 싶었다.

이 여정을 따라가는 동안 그가 고민했던 차에 대한 이상과 고민을 묻고 싶다. 이를 통해 차에 대한 새로운 안목이나 이해, 차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이 해결될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 답사는 그의 후학이 차에 대한 고만고만한 고민을 안고 차를 찾아 나서는 길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작업은 필자 자신에 되묻는 차에 대한 물음일지도 모른다. 의단(疑團)은 사실을 찾아가는 원동력이다. 사실을 규명해가는 길은 진리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차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차란 무엇인가 그리고 차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이 의문은 차를 연구하는 이들의 간단없는 의단이며 화두일 것이다. 필자에게 있어서도 이 의문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차를 향한 의단이다.

따라서 “초의 스님 다삼매(茶三昧)를 찾아”라는 제하로 연재를 시작하려는 의도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동안 초의 스님의 차에 대한 연구를 위해 취합해 둔 자료와 그가 남긴 시문의 편린들, 그와 교유했던 당대의 걸출한 지식인들이 남긴 시· 문을 토대로 초의 스님이 발견한 차에 대한 탁월한 식견과 이상, 수행자로서 인간적인 고뇌를 그려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더구나 그와 인연이 있는 곳을 따라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는 것은 현장성이라는 공간적인 의미이외에도 여러 모로 중요한 뜻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이 연재를 위해 답사를 떠나는 날은 백중 다음날이었다. 새벽 여섯시 서울을 출발하여 천안에 들어서니 장대비가 내린다. 시원한 빗줄기가 뿌연 포말을 일으켜 마치 하늘에서 긴 장막을 드리운 듯하다. 장막이 걷히면 무엇이 나타날까.

초의 스님이 첫 상경 길에 올라 시를 지었던 전주 한벽정은 고즈넉한 정취가 돋보이는 정자이다. 필자가 이곳을 답사한 시점이 비 개인 여름이라는 점에서 초의 스님이 이 정자에 올라 남천을 바라보았던 상황과 일치한다. 우연치고는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다. 영암에 이르니 무화과가 제철인 듯 간이 좌판대에는 무화과가 지천이다. 서둘러 차를 세우고 욕심껏 무화과를 샀다. 배가 부르니 스르르 잠이 쏟아진다.

무더운 여름, 해남 백화사에 도착한 것은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었다. 교통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1970년대 말, 땅 끝 마을 해남은 거의 하루해가 걸리는 멀고 먼 곳이었다. 달랑 배낭 하나를 들고 물어물어 찾아간 곳, 대흥사 반야교 아래에 위치한 백화사는 퇴락될 대로 퇴락된 작은 암자였다. 89세의 응송(1893~1990) 스님은 이곳에 계셨다. 온화한 미소로 필자를 반겨주던 노스님의 모습은 시골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았다.

당시 노스님은 자신이 써 놓은 차에 대한 원고를 현대식으로 윤문할 젊은이를 찾았다. 한학을 공부하던 학도인 필자가 백화사로 간 것은 이렇게 단순한 인연에서 시작되었다. 백화사 문간방에 거처를 정한 후 한 달이 지나서야 노스님의 차에 대한 원고를 윤문하기 시작했다. 초의 스님이 얼마나 학덕과 수행이 높았던 수행자였으며 차의 이론과 제다에 높은 경지를 가진 분인지를 응송 스님에게 들었다. 처음에는 황당하고 지루한 얘기로 들렸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호기심이 생겼다. 이해 겨울을 보내며 아침마다 샘물을 뜨러가는 길도 제법 익숙해졌고 노스님과 함께 차를 마시는 일도 일상화되었다.

백화사의 겨울은 유난히 춥다. 분지처럼 생긴 이곳은 해남읍내보다 섭씨 사오도가 낮았다.
어느 날인가. 새벽에 일어나 보니 온 천지가 흰 눈으로 뒤덮여 있다.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 건곤혼일(乾坤混一)의 경지, 이것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서둘러 노란 양은주전자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온 천지가 눈부시고 투명하게 맑다. 샘물을 뜨러 가는 길에 서서 내가 지금, 여기에 있음이 얼마나 가슴 뿌듯했던가. 한해 겨울이 지나고 또 한해 겨울이 가는 동안 산의 변화를 느끼고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방법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이 무렵쯤에 노스님의 윤문원고도 제법 두툼해졌다. 이 원고는 1985년에 『동다정통고』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소개되었다. 이 해 응송 스님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다도전수게(茶道傳受偈)’를 내렸다.

전함이 없는데도 전했으며 받음이 없는데도 받은 것이라
전함이 없으니 그러므로 참으로 전한 것이요
받음이 없는 고로 참으로 받은 것이라.
(無傳而傳 無受而受 無傳故 眞傳 無受故 眞受)

이 전다게에는 응송 스님의 의미심장한 마음이 담겼으련만 필자는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 게를 받은 이의 책임이 얼마나 중한 것이며 무거운지를 알지 못한 채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차가 무엇인지 묻는 일은
다인들의 간단없는 화두

스님의 발자취 더듬으며
차에 대한 물음 풀어갈 것

1990년 1월, 안개가 짙게 끼던 날 노스님의 열반 소식을 들었다. 한 주 전 스님을 뵙고 왔는데 열반하셨다니 믿기 어려웠다. 급히 서둘러 광주 극락암으로 향했다. 대외적인 활동이 거의 없었던 노스님의 빈소에는 연륜이 깊은 몇몇 다인만이 참석했을 뿐이다. 단출한 다비식이 거행되었다. 어린 시절 민병대 소년병으로 독립에 참가했던 그도, 만주 벌판에서 일군과 싸우던 독립군 중위였던 그도, 대흥사 주지가 되어 불교정화 이후까지 불교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던 스님이었던 그도, 초의의 후인으로 차를 연구했던 그도 모두 사라진 채 한줌의 재가 되었다. 과연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형상적 존재였던 몸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한줌의 재가 된 노스님의 육신은 인연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이치를 자명하게 드러냈다.

이 해 봄 노스님이 떠난 후, 승주 골짜기에서 홀로 차를 만들게 된 필자로서는 마치 노를 잃은 배와 같았다. 무엇을 어찌할지 모든 것이 막막했다. 차를 만들기 위해 솥이 뜨거워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가슴이 꿍꿍 울렸다. 노스님의 빈자리는 상대적으로 커 보였다.

솥에 찻잎을 넣고 깊고 신중하게 대나무로 만든 솔에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하지만 옛날의 그 느낌이 아니었다. 때마침 열을 받은 찻잎이 순간순간 변하는데, 그 충격과 두려움으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미 변화무쌍한 불과 찻잎의 기세에 눌려버린 것. 아! 어떻게 하나. 눈을 감고 천천히 대나무 솔을 저어 보았다. 이때 손끝으로 전해오는 찻잎들이 익어가는 순간의 느낌이 다시 살아나고 두려움도 사라졌다.

현란한 형색은 마음의 중심을 잃게 하기 쉽다는 이치를 이때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차를 만드는 시설이 열악했던 백화사, 어둑어둑한 촉수 낮은 전등불 밑에서 찻잎이 익어가는 기이한 변화를 눈으로 보지 못했다. 다만 손끝으로 느껴지는 찻잎의 촉감으로 차가 어느 정도 덖었는지를 알아차렸던 참으로 어수룩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차를 연구하는 방법에서 가장 실질적이고도 깊이 있는 연구 방법이었다는 사실을 얼마 후에야 깨달았다. 체득을 통해 원리에 도달하는 길은 이만한 것이 없다. 노스님과 매일 마셨던 찻자리는 차의 단계적인 안목을 기르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고 아침마다 샘물을 길어오게 한 것은 하나하나 물의 이치를 터득케 하려는 노스님의 안목이었다. 몇 년 전부터 문헌을 통한 차의 이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초의 스님이 그랬듯이 육우의 『다경』을 토대로 시대 별 차에 대한 전문 서적들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차를 만들며 터득했던 차의 원리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게 표현되었을 뿐 원리는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응송 스님이 필자에게 가르쳐준 이치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아! 정말 차란 무엇인가 이 의단은 간단없는 차에 대한 화두이다. 이 화두가 바로 초의 스님의 다삼매를 찾아 길을 떠나게 했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박동춘 소장은

충북 진천이 고향으로 청명 임창순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응송 스님에게 다도를 전수 받았다.

동국대 대학원 선학과에서 「초의선사의 차문화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논문으론 「고려와 송의 차 문화 」, 「한국 차 문화의 연구」, 「대흥사 제다법의 원류」, 「초의선사의 차풍」, 「한국 차 문화의 특성」, 「한·중·일 선다의 비교」, 「한국전통차의 올바른 이해」, 「한재 이목의 다부소고」, 「범해 다약설 연구」, 「고려와 송의 차 문화 교류」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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