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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 스님 다삼매를 찾아] 2. 고향 삼향면과 출가지 운흥사

기자명 법보신문

40년 만에 옛 고향 찾아 무상을 노래하다

신기리의 신동…15세에 운흥사로 출가
사대부들 약관의 초의 스님 詩才 찬탄

 
초의 스님이 출가했던 나주 운흥사 전경. 몇 년 전까지도 폐사지 같던 사찰이 이제는 제법 절다운 규모를 갖추고 있다.

초의 스님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율사이요, 선승이며 시문에 밝았던 수행승이다. “여섯 개의 별들이 어머니의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후, 그가 태어났다”는 『동사열전』의 얘기는 범상치 않았던 그의 됨됨이를 드러낸 것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전남 무안군 삼향면으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삼향면 구산(舊山) 근처에 마련한 새집에서 보낸 듯하다.

그의 출가 동기가 무엇인지는 세상에 알려진 바가 없다. 15세에 고향을 떠나 나주 운흥사의 벽봉 스님을 은사로 모셨다. 그가 고향의 옛 집을 찾은 것은 1843년으로, 그곳을 떠난 지 40년 만의 일이다. ‘귀고향(歸故鄕)’은 고향을 찾았던 그의 감회를 읊은 것인데, 인간적인 면모가 오롯이 배어난다.

멀리 고향을 떠난 지 40여년(遠別鄕關四十秋)
머리가 하얗게 센 줄도 모르고 (고향에) 다시 돌아왔네.(歸來不覺雪盈頭)
옛 집은 풀에 덮여 사라졌는데 내 살던 그 집은 어디에 있는가(新基草沒家安在)
[(내가) 어릴 때 선친이 구산(舊山)의 오른 쪽에 새로 집을 마련하였다.]
(當時先君開新基於舊山之右)
오래된 무덤가 걸을 적마다 수심이 일렁인다.(古墓苔荒履跡愁)
마음이 쇠잔해졌으니 한(恨)인들 어디에서 일어나며(心死恨從何處起)
몸이 이미 늙었으니 눈물조차 흐르지 않네.(血乾淚亦不能流)
외로운 몸 다시 구름 따라 떠나려 하니(孤筇更欲隨雲去)
아! 이 몸으로 고향 찾음이 부끄럽구나.(已矣人生愧首邱)

 
초의 스님이 제주도로 유배가는 김정희를 위해 직접 그린 ‘제주화북진도(濟州華北津圖)’.

그가 살던 옛 집은 이미 수초에 덮여 흔적조차 사라졌다. 떠날 때의 마음으로 고향 집을 찾았지만 “머리가 하얗게 센 줄도 모르고 (고향에) 다시 돌아왔다”는 구절에서 세월이 무상함을 드러냈다. 이미 돌아가 무덤에 누워있을 혈육들, 부모의 묘소를 참배했을 터. 이리저리 무덤가를 서성일 때마다 꿈속에서도 그리던 옛 집에서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으리라. “걸음마다 수심이 인다”는 대목에선 가슴이 메어진다. 아! 그가 다시 고향을 찾아 온 것은 어떤 마음에서일까. 그가 다시 고향을 찾은 것은 추사 김정희가 계신 제주도를 찾아 갔다 온 이 후라 여겨진다.

당시 초의 스님의 주변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추사가 제주도 유배 길에 오른 것은 1840년이다. 그가 고향을 찾기 3년 전의 일이다. 마음으로 의지하고 통했던 뜻이 같은 사람, 추사의 몰락은 그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급변하는 세상의 인심을 추사만큼이나 통감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1840년 9월 20일 저녁, 제주도 유배 길에 벗을 찾은 추사, 두 사람의 해후가 오죽했으랴. 초암인 일지암은 겨우 두 사람이 앉을 만한 작디작은 공간, 산차를 앞에 두고 달마대사의 『관심론(觀心論)』과 『혈맥론(血脈論)』을 토론했던 추사와 초의, 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했으랴.

뒤숭숭한 세정(世情)을 서로 말했겠지만 지인들의 담론은 자신을 알아주는 벗을 위한 것이고 서로 닦은 높은 경지를 소통하는 일이다. 앞뒤로 모든 뜻을 통달하여 빠짐없이 금방금방 대답했으며, 임금의 은총이 지중함을 칭송하고 백성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으로 여겼던 군자 같은 추사를 어찌하여 하늘은 이런 큰 선비의 뜻을 길러 주지 않는가라고 탄식했던 초의였다. 자신과 추사의 중한 신의(信義), 서로 생각하고 아끼는 도리를 잊지 못하는 사이(公與我信義重厚 不忘相思相愛之道)라 했다.

후일 발견된 추사의 ‘황한사수도(荒寒山水圖)’ 부채 그림에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長毋相忘)’는 도장을 날인한 것은 초의의 이 뜻을 기리기 위함이었던가. 초의와 추사 사이는 호계삼소(虎溪三笑)에 비견되는 19세기 유불간의 대표적인 교유이다. 이들의 중한 신의(信義)는 추사의 안녕을 기원하여 1843년에 그린 초의 스님의 ‘화북진도’ 화제(畵題)에서 밝혀진 것이다. 화제의 행간마다 추사에 대한 배려와 안타까움이 배어난다. 아마 그가 고향을 떠난 지 40년 만에 옛 집을 찾은 것은 추사가 유배된 것과도 어떤 연관이 있는 듯하다.

초의 스님의 옛 집을 찾아 삼향면으로 가든 날은 비 내리는 여름이었다. 삼향면은 30년 전 노스님을 모시고 찾았던 곳이다. 촌로(村老)에게 물어물어 초의 스님의 옛 집터를 찾으려 했지만 그의 자취를 아는 이는 예나 지금이나 드물었다. 이미 분간 할 수 없게 변모해 버린 상황이라 서둘러 초의 스님이 출가했던 나주 운흥사로 발길을 돌렸다.

전남 나주군 다도면 암정리에 위치한 운흥사는 덕륭산 아래에 있다. 이 절의 초입에는 길가에 눈을 부라리고 서있는 석장승이 유명하다. 이것은 19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해학적인 조형미가 돋보인다. 커다란 눈망울, 약간 기울어진 고개가 얼마나 해학적이고 순한지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노라면 금세 웃음이 터진다. 산 넘어 불회사의 석장승은 이보다 규모가 작다.

그가 운흥사를 떠난 것은 대략 1807년경이다. 그는 이곳을 떠난 후 쌍봉사를 거쳐 대흥사로 수행처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수년 전만 해도 운흥사는 폐사지나 다름이 없었다. 절 초입의 석장승과 당간지주가 남아 있어 이곳이 절터였음을 짐작하였다. 지금은 대웅전과 부속 건물이 여법하게 배치되어 제법 절다운 규모를 갖추고 있다.

이리저리 당간지주를 살펴보니 풍화에 씻겨 패인 흔적이 완연하다. 아! 여기에도 세월의 무상한 흔적이 남아 있구나. 한 줄기 구름이 산허리를 따라 하늘로 날아오른다. 마치 주악을 연주하는 비천상을 닮았다. 운흥사란 구름이 피어나는 곳인가 아니면 구름처럼 수행승들이 모이는 곳이란 말인가. 막 운흥사를 떠나며 바라본 덕륭산은 실로 구름이 피어나는 곳이었다. 하도 절묘한 자연의 조화 탓인지 함께 간 어떤 이는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화순 쌍봉사는 초의 스님이 잠시 거처했던 곳으로 전남 화순 이양면 증리에 위치해 있다. 9세기 도당구법승이었던 도윤선사가 창건했다. 사자산문의 기초를 닦았던 도윤은 자신의 도호인 쌍봉을 사찰 명으로 삼았다. 국보 57호로 지정된 철감국사탑이 있고 보물인 철감국사탑비가 남아 있다. 쌍봉사에 도착한 것은 저녁 공양시간이 한참 지난 늦은 시각이었다. 평소 친분 있는 스님께 부탁해 둔 탓인지 늦은 시간인데도 주지이신 영제 스님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셨다.

먼저 인사를 드리니 따뜻한 차를 대접하신다. 물맛이 범상치 않음을 알겠다. 이곳에서도 차를 만든다는 얘기에 호기심이 났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라 내일 아침으로 미루고 자리에 누웠다. 문밖에는 철 늦은 장대비가 얼마나 내리는지 낙숫물 소리가 폭포처럼 들린다.

 
운흥사 입구의 석장승.

초의 스님이 운흥사에서 쌍봉사로 거처를 옮긴 것은 1807년이다. 1809년 대둔사에서 다산 정약용에게 올리는 글을 지은 것으로 보아 쌍봉사에 머물 것은 대략 1~2년 정도로 추정된다. 그가 쌍봉사에서 지은 「팔월십오일효좌(八月十五日曉坐)」와 「추일서회(秋日書懷)」이 『초의시집』에 남아 있다. 약관의 나이를 막 지난 21세 즈음에 지은 시이다. 한가위 새벽이 밝아오는 광경을 잘도 그려냈다. 후일 장안의 재주 많은 사대부들은 초의의 시재(詩才)를 칭찬하였다. 그의 문재(文才)는 젊은 날 지었던 「팔월십오일효좌(八月十五日曉坐)」에도 이미 드러나 있다.

북창에서 졸다가 깨어나 보니 (惺起北窓眠)
은하수는 기울고 먼동이 터온다(河傾遙夜闌)
사방의 산은 높고도 깊은데(四山峭且深)
외딴 암자는 적막하고도 고요하다(孤菴寂而閑)
밝은 달빛은 누각에 비쳐 들고(皎皎月入樓)
산들 바람 난간으로 불어오네(嫋嫋風生欄)
침침한 기운 나무들을 가리고(沈沈氣冪樹)
맑은 이슬은 대 줄기에 흐르네(零露流竹竿)
평소 스스로 단속했으나 끝내는 어긋나니(檢素終違己)
이럴 때는 더욱더 괴로워라(對此還苦顔)
다른 사람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하니(人不解意表)
싫어하고 의심함을 벗어나기 어렵다(難超嫌疑間)
어찌 그렇지 않을 때 막지 못하고(胡不防未然)
서리를 밟고서도 추위만 싫어할까(履霜方惡寒)
점점 동녘이 밝아오고(漸看東頭明)
새벽안개가 앞산에서 피어난다(曉霞起前山)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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