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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스님 다삼매를 찾아] 3. 다산과의 선연

기자명 법보신문

궁벽한 땅 해남에서 어진 스승 다산을 만나다

아암 스님 소개로 다산과 인연 시작돼
다산에 대한 존경심 행간마다 오롯이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

호남의 소금강 혹은 5대 명산 중 하나로 손꼽이는 월출산(月出山)은 소백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한다. 백제시대에는 월나산(月奈山), 고려시대에 월생산(月生山)으로 불렸던 곳. 조선시대에 다시 월출산으로 개명된 신령한 산이다. 달과 깊은 관련이 있는 듯, 산 이름마저 월출인 웅장하고 당당한 산. 여기에서 초의 스님은 개오(開悟)했다 전해지는데 그가 이 산에 오른 것은 운흥사에서 쌍봉사로 잠시 거처를 옮긴 1806년경으로 짐작된다.

범해의 『동사열전』 「초의선백전」에 “19세가 되던 해 월출산에 올랐다가 마침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광경을 보고 밤늦게까지 졸지 않고 앉아서 달을 바라보니 마음이 열렸다.”라 한 것이나 신헌의 「초의대종사탑비명」에는 “멀리 바다에서 만월이 뜨는 광경을 보고 황홀하여 마치 종고노사(宗杲老師)의 훈풍을 만난 듯 마음에 막힘이 없었다”라 한 것도 모두 그가 월출산에서 개오한 순간을 감칠 맛나게 표현한 것이다.

오래전부터 초의 스님이 대둔사로 수행처를 옮긴 연유가 궁금하여 여러 문헌을 조사하던 중 범해의 『동사열전』 「완호강백전」에 이 연유를 밝힐 만한 자료가 고구마 줄기처럼 딸려 나왔다. 아 이랬구나! 사람간의 지중한 인연의 퍼즐이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로구나. 인연사의 오묘한 이치가 신기하기만 하다.

완호 스님은 원래 해남사람이다. 대둔사 서일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백운 스님에게 법을 받았다. 그는 1802년 3월 함평 용천사의 용문암에 머물다가 이 해 겨울 운흥사 관음전으로 거처를 옮겨 수행했다. 다음해인 1803년 봄 미황사로 떠났으니 그가 실제 운흥사에 머문 것은 겨울 한 철이었다. 당시 초의 스님은 벽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완호 스님과의 인연은 여기에서 맺어진 것. 완호 스님은 첫 눈에 범상치 않은 그의 인물됨을 알았을까. 이들의 사제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어 1809년 정월 대둔사로 수행처를 옮긴 완호 스님을 따라 초의도 함께 간 듯하다.

대둔사는 초의 스님과 선연(善緣)이 있는 곳. 여기에 온 첫 해, 그는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과 인연을 맺었다. 그가 자신을 알아주는 평생의 지기 추사 김정희를 만난 것도, 경향의 명망이 있는 사대부들과 깊은 정을 나누었던 일도 다산과의 인연으로 시작된 것임이 분명하다.

다산과의 소중한 인연은 당시 만덕사에서 수행하던 아암을 통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1809년 초의 스님이 쓴 「봉정탁옹선생(奉呈翁先生)」은 다산에 대한 그의 존경심이 오롯이 배어 있다.

그는 이 글에서 당시 조선 사회의 현실을 “참다운 가르침이 멀어지면(眞風遠告逝) 큰 거짓만 일어나는 것.(大僞斯興焉) 마을마다 선비는 가득하지만(閭巷滿章甫) 어디에도 어진 사람을 찾기 어렵네(千里無一賢) 이미 마을마다 욕심이 가득 차 있으니(州里旣悐悐) 오랑캐의 풍속에선 당연한 것이지.(蠻貊理固然)”라고 통탄하였다. 사람다운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 예나 지금이나 속세의 현실은 마찬가지인 듯.

하지만 아름다운 자신의 본성을 실현코자하는 그의 노력은 “(그래도)나는 내 도리를 행해보려 해도(所以行己道) 어디에게 물어야할지 끈이 없구나(將向問無緣) 이리저리 향기 나는 곳 찾아가 봐도(歷訪芝蘭室) 끝내는 비린내 나는 생선 가게 같았지(竟是鮑魚廛) 남쪽으로 모든 성을 돌아다니랴(南遊躬百城) 청산의 봄을 아홉 번이나 보냈다오(九違靑山春)”라는 것에서 또렷이 드러난다.

 
초의 스님이 직접 그린 ‘다산도’.

그가 9년의 세월을 이리저리 돌아다닌 것은 진실한 사람을 찾으려 한 것인가 아니면 참된 진리를 찾아 헤맨 것인가. 궁벽한 땅, 해남에 하늘이 어진 스승을 보냈다는 그의 의표는 다산이 강진에 유배 온 것을 이리 표현한 것이다. 가슴에 진한 감동이 일렁인다. 얼마나 고대했던 일이었을까. 간절한 마음은 하늘도 감동케 하는 것인가. 다산의 입장에서야 강진으로 유배 온 일이 감당하기 어려웠으련만 한편에선 요행으로 여기는 기연, 이 이치를 무엇으로 설명할까.

그가 다산을 얼마나 존경했는지는 이 글의 행간마다 드러나는데, “(다산의)덕업은 나라 안에서 으뜸이고(德業冠邦國) 예의 바른 모습, 착한 본성이 다 훌륭하시네(文質兩彬彬) 평소에도 항상 의를 생각하고(燕居恒抱義) 실천에 나서면 다른 사람을 배려하시네(經行必戴仁) 이미 완성되었으나 모자란 듯이 하시고(旣滿如不盈) 항상 (자신을)비워 남을 포용하시네(常以虛受人)”라는 것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가 만난 최고의 스승 다산은 문질(文質)이 훌륭하게 빛났던 선비로, 문질이 빈빈(彬彬)한 군자는 공자도 이상으로 여겼던 것. 조선 후기 최고의 선비, 다산은 초의 스님에 의해 이렇게 그려졌다. 그뿐인가.

다산은 공자처럼 시중(時中)을 실현했던 군자로, 다산을 조선의 공자라 여긴 듯하다. “군자가 때를 만나는 것은 귀한 일이나 (君子貴遇時) (때를) 만나지 못해도 원망하지 않으시네(不遇亦不嚬) 도가 크면 원래 수용되기 어려워(道大本不容) 어려움에 처해도 온화하시네(流落且誾誾)”라는 대목은 시중(時中)을 자재한 다산의 인품을 드러낸 말이다.

이러한 현자를 찾아가 배움을 청하는 그의 열망은 “내 이런 도를 구하려고(我爲求此道) 멀리서 이 정성 드립니다.(遠來致恂恂) 또 곁을 떠나며(且將違座側) 종아리를 걷고 가르침을 청하니(摳衣請諄諄) 만일 수레가 떠날 때 주신 말씀일랑(贈謝車言) 가슴에 새기고 또 띠에도 새기렵니다.(鏤肝復書紳)”라는 말처럼 간절한 것이었다.

한편 그가 스승을 찾아 갈 때 드릴 납폐(納幣)가 없는 자신의 처지를 진솔하게 드러낸 것이나 그의 진심을 알리려는 소박한 정은 수행자다운 태도로 “부자는 사람을 재물로 송별하고(富送人以財) 어진 이는 말로써 보내네.(仁送人以言) 지금 스승에게 말씀드리려 하지만(今將辭夫子) 저는 마땅히 올릴 것이 없습니다(可無攸贈旃) 조심스럽게(저의) 마음을 펼쳐(先敬舒陋腹) 선생님의 안전에 펴놓으려합니다(請陳隱几前)”라는 것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초의 스님의 이런 정성이 통해서인지 그를 아끼는 다산의 마음은 「증언이십삼칙(贈言二十三則)」에서도 드러나고, 『대둔사지』 편찬을 감수했던 다산이 초의 스님을 참여시킨 것도 그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초의 스님이 다산과 왕래하는 일을 대둔사 사중에서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은 듯. 그를 비난하는 여론이 비등했던 모양이다. 『일지암문집』에 “근자에 어떤 요망한 산승이 ‘혹 제가 몇 해 동안 송암을 지키고 있는 동안 유림으로 돌아갈 조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저의 스승에게까지 들어가서 제 스승도 따라 의심하시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이런 말 때문에 스승님(다산)의 훌륭한 덕에 누가 될까 염려가 되어 마침내 왕래함이 드물어 마음속이 거칠게 되었습니다. 비록 다시 모실 기회가 온다하더라도 주변의 수군거림으로 인해 마음을 다 펴놓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내용을 통해 당시 다산을 찾아가 배움을 구했던 초의 스님의 처지가 곤란에 놓였던 사실이 밝혀진 셈이다.

강진의 다산초당은 당초 다산이 머물렀던 초당과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다. 지금의 다산초당은 다산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전, 그를 흠모하던 강진의 뜻있는 인사들이 십시일반 출원하여 복원한 것이라는데 초의 스님이 그린 「다산도」를 참고하지 않은 듯하다. 이들의 다산에 대한 충정이야 길이 전해져야겠지만 지금쯤은 여법하게 초당의 원형을 복원하는 일도 매우 시급해 보인다.

 
복원된 다산초당.

초의 스님의 자취를 따라 다산초당을 찾던 날은 무더운 여름이었다. 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전날 내린 비로 진흙탕 길이다. 사람들의 무심한 발길에 뿌리까지 앙상히 드러낸 나무들, 우중충한 숲이 묘한 인상을 준다. 거거년 초당을 찾았을 때 푸르디푸른 하늘빛과 묘한 대조를 이루던 붉은 동백꽃이 그리워지는 건 고즈넉한 낭만을 동경하는 이상주의자의 몽상인가.

초당을 내려오는 길에 어쩔 수 없이 밟아야하는 나무뿌리를 애써 피해 보지만 역부족이었다. 불편한 마음을 뒤로 하고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번듯하게 세워진 다산기념관에서는 때마침 치원 황상과 관련된 유물 전시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었다. 황상은 다산이 강진 유배 시절 길렀던 진실한 제자로 끝까지 사제의 의리를 지켰던 사람이다. 다산이 해배된 후 서울로 돌아간 뒤, 강진 백적산 기슭에 초당을 짓고 평생을 주경야독했던 산림처사였다.

그가 살던 일속산방은 소치가 그린 「일속산방도」가 남아 있어서 초당의 규모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그가 살았던 초당은 흔적조차 사라지고 옛터엔 칡덩굴만 무성하다. 집터 주변으로 병풍처럼 둘러친 백적산의 뛰어난 승경은 예나 같겠지만 초당 앞으로 흐르던 맑은 시냇물은 저수지로 변했다. 찰랑대는 물가에 서서 멀리 황상의 구허(舊墟)를 바라보니 옛 터의 아름다움이 하도 그윽하여 이런 시가 떠올랐다.

청산은 유유한데 인걸은 어디 있나
살랑대는 바람결에 물결만 일렁댄다.
빈 골짜기에 옛사람 계시는가!
행여 글 읽은 소리 들릴까 봐
공연히 귀 기울인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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