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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깊이가 있는 사유로서의 불교

기자명 법보신문

세상 구원은 이분적 분별심서 오지 않아
두부 모를 자르듯 갈라놓는 주장은 위험

지난 회에 말했던 것처럼, 세상의 사실이 근원적으로 애매모호하다는 것은 이 세상의 현상이기 때문에, 세상의 구원이 이원적 분별심에서 오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는 진/위, 선/악, 미/추, 성/속 등의 차이가 단지 두개의 이분법으로 이원화되어서는 안되고, 불이법(不二法)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저 두가지가 동일하다고 우기지 않는다. 여기에 불교적 사유의 오묘한 깊이가 깃들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시기 직전에 밤하늘의 반짝거리는 새벽별을 보신 후에 문득 우주의 철리를 깨달았다는 고사가 우리에게 와닿는다. 그 새벽별(금성?)이 반/짝거렸다는 것은 삼라만상이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의 현상으로 자신을 현시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 않는가?

 

삼라만상은 각각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각각 하나의 독자적인 개체로 여겨서는 안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개체들도 기실 음양법처럼 하나의 짝을 이루는 존재방식을 이루어서 존재한다는 대대법(待對法)의 구조를 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일반화하면, 그 유명한 연기법의 법칙이 성립한다. 그러므로 연기법의 법칙과 여기서 언급되는 대대법은 사실상 같은 것을 다르게 언명한 것이다.

 

우리가 지난 회에 암시한 불교적 세상보기의 애매모호성도 한 쌍의 연기관계에 있는 사실을 동시에 말함으로써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일컫는다. 우리는 보통 애매모호성을 흐리멍텅하고 혼돈스러운 것을 일컬을 때에 사용하는 말로서만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만큼 세상을 지성의 인위적인 공작에 짓눌려 살아왔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성의 인위적인 조작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불교적 사유방식을 깨닫는 것 밖에 없다.

애매모호하다는 것은 세상의 진리를 언명한 것이다. 세상의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세속에서 너무 명쾌하게 사태를 두부모 자르듯이 칼날처럼 갈라놓는 논리나 주장따위에 우리가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얼음날처럼 예리한 선악논리에 사태를 분석하는 생각은 너무나 선명해서 회끈한 한국인의 생리에 맞을는지 모르나, 기실 그런 생각은 대단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 논리는 흑백으로 세상을 재단하기 때문이다.

흑백논리로 세상을 재단하는 경우에 조선조 오백년 간에 우리를 불행히도 지배하던 까마귀/백로의 이분법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조선조의 사색당쟁의 근본원인도 저 흑백논리의 선명성에 기인한다. 지금도 한국 정치의 모든 혼란의 근본원인도 저런 선명성의 경쟁에 바탕하고 있다. 더구나 한국 현대 정치사를 누볐던 선명성의 경쟁을 위한 기치(旗幟)도 한국의 정치발전을 가로막은 원흉이라고 읽어야 하겠다. 흑백의 선명한 논리 앞에서 많은 구체적 양식들이 상처를 받고 쓰러졌다.

한국인은 사유의 깊이를 배워야지, 사유의 표피적인 대립만을 외쳐대서는 단세포적인 슬로건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우리를 어지럽게 하고 경박하게 만드는 것은 모두 저렇게 깊이가 없는 사유의 경박 부조한 슬로건들이다.

 

주먹을 쥐고 머리띠를 매고 뒤흔드는 악소리가 우리를 멍멍하게 만든다. 불교는 이런 류의 경박부조한 형태를 멀리한다. 우리는 불교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길을 보아야 하겠다. 단세포적인 단편적 개념이나 희롱하고, 구체적 연결망을 무시한 추상적 구호만으로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다.

깊이가 있는 사유는 즉흥적 행동에 배고파하지도 않고 그래서 충동적인 말을 뇌까리지도 않는다. 깊이가 있는 사유는 이미 사려깊은 행동을 품고 있다. 현실참여라는 이름으로 천박한 사유와 충동적인 행동과 슬로건적인 말이 도처에 넘쳐난다. 구복적인 신앙으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사고방식의 혁명을 일으키는 불교를 생활화하자. 영가대사의 『증도가』가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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