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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 스님 다삼매를 찾아] 6. 두 번째 상경과 용문사

기자명 법보신문

스승의 탑명 구하려 15년만에 한양길 다시 올라

장안 사대부와 본격적인 교유 계기
용문사 대웅전 현판 추사 글씨 확인

 
1830년 겨울, 초의 스님은 이곳 용문사에 머물며 ‘쓸쓸한 용문산 아랫길 옛 절터에는 시골사람이 밭을 갈고 있네(惆悵龍門山下路 寶坊遺與野人耕)’라는 시를 읊었다. 경전을 외는 소리 낭자했을 옛 절터에서 고단한 삶을 위해 밭을 갈고 있는 농부. 그 교차되는 시공간 속에서 초의 스님이 느낀 무상의 무게는 얼마였을까.

초의 스님이 두 번째 상경 길에 오른 것은 1830년 겨울이다. 그는 스승 완호 스님이 열반하자 2년 후 완호탑을 완성하고 이 탑의 음기를 썼다. 다시 2년 뒤 그는 스승의 탑명을 구하기 위해 상경한 것. 실로 15년 만에 다시 한양을 찾은 셈이다. 최근 발굴된 『주상운타(注箱雲朶)』는 초의와 추사의 교유를 확인할 자료이다. 더구나 이 첩의 말미에 초의가 쓴 후기가 남아 있어 당시의 정황을 알 수 있다.

1830(경인)년 겨울에 취연과 함께 상경하여 홍현주에게 탑명을 구하려 하였다. 먼저 능내리의 정약용 선생을 찾아뵙고 그 다음에는 용호로 김정희를 찾아갔으나 김노경이 탄핵 받은 일로 인해 홍현주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정학연이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청량산방에서 만나기를 약속했지만 김정희의 일로 인해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다음 해 1831(신묘)년 정월 중순에 비로소 청량산방의 보상암에서 아름다운 모임이 이루어졌는데, 봄밤의 놀이에는 홍현주, 윤정진, 이만용, 정학연, 홍의인, 홍성모와 나를 합하여 모두 일곱 사람이 모였다. 운(韻)을 나누어 시를 지으니 (이는) 정말 좋은 인연이다. 홍현주는 성에 들어간 후, 수일 만에 탑명을 지어 두릉으로 보냈다. 신위가 홍현주의 명으로 서문을 쓰게 되었다. 그해 겨울과 봄 사이 나는 용호에 머문 날이 많았고, 취연은 추위를 무릅쓰고 양쪽을 왕래하는 일이 잦았다.

(道光庚寅冬 與醉蓮上京 乞先師塔銘於海居都尉 先往杜陵 謁翁先生 次見禮堂於蓉湖 由寂被 留海翁因酉山聞余至約與一會於淸凉山房 拘於禮堂 未果 明年辛卯正月中澣 始成雅集於淸凉之寶相庵 爲春夜之遊 海居都尉 尹絅堂 李東樊 丁酉山 洪樗園 洪葯人 與余合七人 分韻賦詩信宿 而別海道人 入城數日 著塔銘寄送杜陵 序則 承敎受之於紫霞申公 於其冬春之間 予則多住於蓉湖 蓮則冒寒往來於兩地者多矣)

이 자료를 통해 그의 두 번째 상경 길에 동행한 인물이 바로 취연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상경 후 그가 가장 먼저 찾은 이는 다산이었다. 그는 추사 댁에 머물며 탑명을 구하여 했지만 김노경이 탄핵된 일로 인해 임시로 홍현주의 집에 머물게 된다. 한편 그가 다산을 찾아갔을 당시 정학연을 만나지 못한 듯하다. 이는 그가 청량산방에서 정학연을 다시 만나기로 했지만 약속을 이행하기가 여의치 않았다는 것을 통해 확인된다.

초의는 이 해 겨울에서 이듬해 봄까지 대부분 용호의 추사 집에서 머물렀다. 그가 장안의 사대부들과 본격적인 교유가 재개된 것은 1831년 정월 중순 청량산방 보상암의 시회(詩會)이다. 홍현주가 주관한 이 시회는 초의의 시재(詩才)가 이들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상경 이유였던 완호의 탑명도 얻게 된다. 특히 탑명을 홍현주가 쓰고 홍현주의 청으로 신위가 탑의 서문과 글씨를 쓰게 된 것도 이 시회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후일 이 탑명의 글씨는 결국 신위가 탄핵을 받아 형역을 당했기 때문에 권돈인이 쓰게 된다. 모든 일에는 인연이 있는 것인가 보다.

 
『주상운타(注箱雲朶)』 후기 부분으로 초의 스님이 글을 썼다.

한편 초의 스님은 1831년 초여름 하전 김익정(夏篆 金益鼎)의 권유로 용문산 유람길에 오른다. 당시 김익정과 초의 그리고 민화산(閔華山), 이렇게 세 사람은 배를 타고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 용문산으로 향했다. 그가 이 승경지에서 쓴 9편의 시는 그가 경유했던 곳의 정취를 그림처럼 그려냈다. 강을 따라 유람하며 지은 시엔 여행의 설렘이 묻어난다.

날렵한 몇 폭의 돛단배로 용문을 향하니(輕帆數幅向龍門)/ 한 줄기 맑은 강물은 동산을 껴안은 듯(一帶澄江抱幾園)/ 아름다운 산 스쳐 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자꾸 고개를 돌리고(憐過好山旋注目)/ 절묘한 글귀 찾으려 말을 잊었네(爲搜佳句坐忘言)/ 좋은 날 흡족한 유람 함께하긴 참으로 어려워(良辰共作眞遊少)/ 신령한 경계 좋은 일에도 번거로움 있다는 걸 누가 알리요(靈境誰知勝事繁)/ 청상(淸賞)은 단지 적시(適時)를 얻음이 필요한 것일 뿐(淸賞但要時取適)/ 어찌 헛된 이름 오래도록 남기려 쓰는 것이랴(虛名何必寫長存).

절경(絶景)을 절창(絶唱)으로 담아내려는 그의 심사는 ‘말을 잊었다’라고 한 것으로 압축된다. 정녕 ‘신령한 경계, 좋은 일에도 번거로움이 있다는 걸 누가 알리요’라는 그의 고백은 진솔한 마음의 갈등을 그려낸 것. 이들은 분명 승경지의 아름다움을 서로 노래한 화답시를 남겼으련만 노탄(蘆灘)에서 초의가 지은 「노탄모박(蘆灘暮泊」’만이 그의 문집에 남아 있다. 이 시에 그들이 노탄에 배를 댄 것은 ‘선방이 아직도 멀다기에 배에서 내려 물가의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었다(聞道禪房猶是遠 下船仍宿水邊家)’라고 하였지만 강가의 저녁노을, 초여름 밤 불어오는 강바람이 이들의 발목을 잡아 둔 것은 아닐까.

다음날 양평 사천(斜川)의 옛 절터에서 ‘엷은 놀 드리우자 동녘이 밝아오고 곱디고운 아침 해 적성 위로 떠오른다(輕霞冉冉曙光晴 旭日涓涓上赤城)’라고 한 것으로 보아 새벽에 길을 떠난 듯하다. 이어 번성했던 옛 절터는 밭으로 변하고, 이곳에서 밭을 갈고 있는 농부와 마주친다. 그가 ‘쓸쓸한 용문산 아랫길 옛 절터에는 시골사람이 밭을 갈고 있네(惆悵龍門山下路 寶坊遺與野人耕)’라 한 것은 이를 두고 말한 것. 경전을 외는 소리 낭자했을 옛 절터에서 고단한 삶을 위해 밭을 갈고 있는 농부! 이 교차되는 시공간 속에서 그가 느낀 무상의 무게는 얼마였을까. 이 시의 행간에 드리워진 그의 감회가 절절하게 느껴진다.

이어 이들은 정오쯤 사나사(舍那寺)에 도착한다. 이곳은 태고 보우와의 인연이 깊은 곳. 그의 부도 탑이 여기에 있다. 원래 이 사찰은 신라 경명왕 7년(923)에 대경대사가 세웠고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셨기에 사나사라 명명했단다. 선조 25년 임난 때 소실되어, 1773년 양평군의 지방 유지들이 당산계를 조직, 향답(鄕畓)을 이 절에 시주해 다시 중창했다고 한다. 따라서 초의가 이 절을 찾았을 당시의 사나사는 매우 쇠락했나 보다. 「오입사나사(午入舍那寺)」에 ‘이끼 낀 고송은 오래되어도 성성한데 풀 우거진 쇠락한 절이 반쯤이나 기울어졌네(苔遍古松全老後 草深荒屋半頹邊)’라고 한 것에서 확인된다.

다시 이들이 사나사를 뒤로 하고 수월암(水月庵)에 도착한 것은 날이 저문 저녁 무렵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유람의 고단한 여장을 풀었다. 벌써 이들이 한양을 떠난 지도 이틀이 지났다. 수월암에서 이들이 나눈 고담이 어떤 것인지 ‘보배는 응당 세상의 밖에서 찾아야지(寶所應須世外尋)’라는 초의의 말은 이들의 열띤 토론이 뭣인지 짐작케 한다. 다음 날 이들은 가섭봉에 올랐다가 윤필암을 거쳐 해 저물 무렵 상원암에 도착한다. 이들이 용문사를 찾은 것은 아침나절로 이곳을 돌아본 후 용문산 유람의 3일 여정을 끝내고 오던 길을 돌아 용호로 갔으리라.

필자가 용문산을 찾은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새벽안개를 헤치고 용문사에 오르니 절 앞의 은행나무가 위용을 뽐낸다.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은행나무는 얼마나 오래도록 이 자리에 서서 거래(去來)의 인연사를 노래했을까. 절로 오르는 길엔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한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필시 아침 공양 후 포행을 나온 듯, 이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대웅전 문살에는 소나무와 사슴, 목단의 화려한 꽃판이 조각되어 있었다. 참으로 특이한 문양이다.

초의 스님도 이 문살을 보았을까. 초의와 가까웠던 추사를 생각하며 대웅전이란 현판을 올려다보니 꽤나 눈에 익은 글씨이다. 혹 추사가 이 현판을 쓴 것은 아닐까하여 현판 옆에 새겨진 작은 도장을 확인해 보니 아! 완당이란 글자가 선명하다. 추사와 용문사, 어떤 인연으로 추사는 이 현판을 썼을까. 용문사는 필자에게 이런 의문을 던져주었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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