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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초의 스님이 머문 수종사

기자명 법보신문

백설 휘날리는 산사에서 절친한 벗들과 시를 읊다

서슬 퍼런 선의 지극한 경지 드러내
한양의 사대부들에게 깊은 영향 끼쳐

 

 

수종사에서 바라본 두릉. 이곳 수종사에서 초의 스님은 지우(知友)들과 시를 교유하면서도 절경에 얽매이는 스스로를 자조하기도 했다.

 


초의 스님과 인연 깊은 운길산 수종사(水鐘寺)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암자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되는 곳에 두릉이 섬처럼 떠 있어 마치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다산 생가 옆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 초의 스님은 유산의 형제들과 이 강가에 조각배를 띄우고 서로의 속 깊은 정을 나누기도 하였고 한양의 지체 높은 인사들과도 교유했다. 수행승과 달사(達士), 뜻 맞는 지기(知己)의 걸림이 없는 종유(從遊)의 아름다움은 오래도록 후인의 가슴을 울린다.


수종사는 원래 신라 때, 조성된 고찰이란 설도 있지만 세조와 관련된 일화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세조와 수종사에 얽힌 일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어느 날 세조는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오대산을 들렸다. 한양으로 돌아가던 길에 어디선가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 왔다. 기이한 종소리에 이끌려 소리 나는 곳을 찾아 가 보니 산 중턱 토굴 속에 18나한이 봉안되었고 토굴 속 바위틈으로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방울, 물방울이 떨어지며 내는 소리가 은은한 종소리 같았던 것. 세조를 이곳으로 이끈 것은 나한의 조화였던가.


신심 깊은 세조는 이 자리에 절을 세워 18나한상을 봉안하고 이곳을 수종사라 불렀다. 왕권의 찬탈로 얼룩진 자신의 과보를 씻기 위해 여러 절을 참배하며 참회했던 세조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서를 간행했던 군주였다. 그는 김시습을 불러 자신을 참회할 수 있는 인연을 지으려했다. 그러나 법상에 있어야 할 김시습은 해우소에 빠져 목만 내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매월당의 장쾌한 할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었던 강개한 간언이요 진심어린 충언이었다.


‘물소리가 종소리’라는 뜻을 지닌 수종사, 대웅전 왼편 팔각오층석탑 곁에 서 있는 단아한 부도는 세종 21년에 세워졌고, 세조의 고모인 정의옹주를 모신 부도라 전해진다. 더구나 몇 년 전 이 오층석탑에서 발굴된 불감과 불상이 요즘 조계종 불교역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데 일괄 출토된 불상은 근래 보기 드문 호상을 지닌 수품(殊品)이라 수종사가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얼마 전 답사 길에 찾았던 수종사의 돌샘은 쇠문으로 봉해진지가 오래된 듯, 철문에 칠한 페인트 사이로 붉은 녹이 드러난다. 세조의 마음을 움직인 샘물 소리는 바로 수종사를 세운 증표와도 같아서 이 샘물의 공덕이 작은 것은 아닌데도 샘물의 관리에 소홀한 후인의 무지가 부끄럽기만 하다. 수종사로 오르던 옛 길, 절 문 밖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은행나무는 한 자리에 서서 오백여년 풍상을 견디었다. 깊고 투박한 표피가 용린(龍鱗)처럼 장엄하다.
1830년 가을, 한양에 온 초의는 수종사에 머물렀다. 이 해 겨울 여기에서 석옥화상의 시에 차운하여 ‘수종사차석옥화상운(水鍾寺次石屋和尙韻)’ 12수를 남겼다.


어느 날 초의를 찾아 수종사에 온 정학연 형제와 광산 박종유는 폭설로 돌아가지 못하고 설경을 감상했다. 이들은 잔잔한 강 위로 휘날리는 백설을 보았을 것이니 이만한 승경에 시가 빠질 수 없었을 터. 설경을 감상하며 지은 이들의 시는 그 중 일부만이 전해진다. 이어 유산 형제들과 여러 사백들이 두릉의 유산 집에서 모여서 시회를 열었다. 초의는 당시 이곳에 모인 인사들을 사백(詞伯)이라 한 것으로 보아 유산 주변의 시재(詩才) 있는 이들의 시 모임이 분명하다. 초의는 이 시회를 ‘두릉시사(杜陵詩社)’라 하였다. 이 시사(詩社)에 모인 인사는 초의, 유산과 운포 정학유, 진재 박종림, 광산 박종유였다. 초의의 ‘두릉시사여제사백동부(杜陵詩社與諸詞伯同賦)’는 바로 여기에서 지은 시이다.


구름 따라 여기에 와 그윽한 곳 사랑하니 (雲蹤到此愛幽居)/ 언덕에 끌린 정, 아직 끊지 못한 것이 우습구나.(邱壑情緣笑未除)/ 곱디고운 초승달 맑게 갠 저녁에 떠오르고(細月涓涓新霽夕)/ 엷은 안개 서린 언덕엔 석양 노을 비친다.(斜陽艶艶澹煙墟)/ 뜻 높은 선비야 누가 오겠나(安貧達士誰能致)/ 자리가 높아지고 좋을 땐 소원해지기 쉬운 것(高尙明時易見疎)/ 강 가까이 숲이 깊어 찾는 이가 드무니(江近林深人跡少)/ 이 중에 좋은 벗, 반은 물고기와 새이라(此中友樂反禽魚)

 

‘일지암시고’ 중 유산의 시.

이들의 시 모임의 분위기가 한눈에 그려진다. 뜻이 통한 지우(知友)의 모임이야 감로처럼 달콤한 것. 초의도 이 정을 모를 리 없어서 “언덕에 끌린 정 아직 끊지 못한 것이 우습다”하였다. 수행자는 풍상(風賞)에 흔들리지 않아야하는 것, 그러나 그윽한 고회(高會)의 아정(雅正)은 초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래서 우습다는 그의 일언은 초의가 자유인임을 한 쾌로 드러냈다. 서편 산 위에 뜬 초생달은 초의의 서슬 퍼런 선풍을 드러내기 족하다. 해 저문 언덕엔 그래도 석양의 잔영이 빗겨 있다. 다섯 명의 사백들, 유산은 그래도 초의의 시에 창수할 만한 사람. 그는 이렇게 화답했다.


소슬한 토담집을 벗어나지 않은 채(不出蕭然環堵居)/ 피고 지는 매화에서 성쇠를 깨달았네(梅花開落見乘除)/ 화려한 세월 골짜기로 사라지는 구름처럼 허무하고(年華忽幻雲歸壑)/ 밤빛만 공연히 물과 언덕을 비춘다(夜色空明水接墟)/ 술잔 기우려 가련하고 궁색한 늙은 삶 달래면서(使酒堪憐窮後數)/ 선(禪)을 말해도 병들어 관심 적어짐이 못내 아쉽다네.(談禪還惜病中疎)/ 다만 모두 편안히 늙어가기 바랄 뿐(只須共向臨平老)/ 그대는 풍광을 감상하고 나는 고기나 낚으리.(君在風蒲我釣魚)


유산은 불교와 가까웠던 인물이다. 그는 대둔사의 초의와 아암, 철선, 수룡 스님과 교유하였다. 이런 인연이야 다산으로부터 이어진 것. 그는 두릉의 초막에서도 매화가 피고 지는 이치를 보고 인간사의 성쇠를 깨달았고 한다.


예부터 군자는 세상에 나가지 않아도 세상을 교화할 수 있다는 것이니 공멸의 이치야 어디인들 없으랴. 자연의 이치는 아는 이에게만 열리는 법이다. 속세의 부귀가 뜬 구름 같다고 한 말이야 종래로부터 회자된 언구(言句)이지만 평안한 여생을 바라는 유산의 바람은 소박한 필부의 소망이기도 하다. 늙어가는 삶의 공허함을 술로 위로하지만 성쇠의 이치를 알았던 유산이기에 무슨 미련이 있었으랴 담선(談禪)의 궁구한 물리 가까워지고 싶지만 병들어 몰입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못내 아쉬워하였다. 진재 박종림은 초의 스님을 보고 “세속에 얽매인 몸 참으로 부끄럽구려”라 하였으니 이들의 종유에서 초의의 훈풍이 어떤 연향을 미쳤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어 이들은 채화정에서 다시 모여 미진한 회포를 풀었으니 이것이 ‘채화정아집(菜花亭雅集)’이며 1830년 동지(冬至)가 지난 다음다음날에 다시 모여 시회를 열어 무궁한 사백의 아량을 힘껏 드러냈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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