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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전 교수 호진 스님 불타관 문제 많다”

기자명 법보신문
  • 기고
  • 입력 2010.12.11 12:26
  • 수정 2015.02.09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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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선원 이제열 법사 본지 기고문서 비판
부처님 완전성 부정하고 중생으로 끌어내려
악마·외도에 굴복하는 불타관 당장 철회해야
부처님을 싯다르타로 부르는 것은 외도들뿐

동국대 전 교수 호진 스님이 인도 성지를 순례하는 동안 조계종 승가대학원장 지안 스님과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성지에서 쓴 편지’가 근래 출간된 가운데 재가법사인 이제열 유마선원장이 호진 스님의 불타관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기고문을 본지에 보내왔다.이제열 원장은 지난 30여년 간 포교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가법사로 ‘금강경 대강좌’ ‘수행으로 가는 길’ ‘법수로 배우는 불교’ ‘완전한 깨달음’ ‘왕초보 금강경 박사되다’ 등 저술을 펴내기도 했다. 편집자 
 

▲이제열 법사
 
오로지 불퇴전의 원력으로 평생을 교학 발전에 헌신해 오고 계신 호진 스님께 인사를 올립니다. 생면부지의 속인이 불쑥 스님 앞에 이렇게 지면으로 인사를 올리게 되어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더구나 전력투구 피나는 구도행각으로 펴내신 역작 ‘성지에서 쓴 편지’에 대해 이런 글을 올리게 된 점을 매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스님의 성지에서 쓴 편지는 여태까지 나온 일반 성지순례 기행문이나 부처님 일대기와는 달리 형식도 특이하려니와 그 내용에 있어서도 대단히 획기적이라고 느꼈습니다. 특히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알아왔던 부처님의 행적에 대한 시각을 거부하고 좀 더 사실과 진실에 부합된 부처님의 모습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스님의 부처님 행적에 관한 그와 같은 글의 내용들에 대하여 한편으로 수긍을 하면서도 적지 않은 당혹감과 우려를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감히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솔직히 진실과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부처님의 행적을 기술하시려 했던 글의 내용이 오히려 진실과 사실을 오도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신화 속 진실 모르는 무지가 오히려 문제

우선 스님께서는 역사적인 부처님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한다면서 “진실의 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화다”라는 말을 앞세워 “역사적인 부처님의 참 모습을 보려면 신화와 전설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32길상과 80종호의 부처님 상을 괴상한 모습으로 기술하시고 ‘본생담’에 나오는 부처님의 전생담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경전에 나오는 범천이니 제석천이니 하는 신들과의 관계도 실재하지 않았으니 이제는 이런 말들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스님께 여쭙습니다. 신화나 전설이 그렇게 인류에게 악영향을 미쳤는지요? 그리고 신화와 전설은 스님 말씀대로 어린아이에게만 필요 할뿐 어른에게는 필요치 않은지요? 저는 여기서 신화와 전설의 성격이나 기능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화를 무조건 배격해야 한다는 스님의 지론에 위험성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류문명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발전하기까지는 어느 민족이건 신화와 전설이 바탕이 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세계문명을 이끌어온 민족이나 국가들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다른 민족이 갖지 못한 풍부한 신화와 전설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은 신화와 전설 속에 인간의 진실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을 지니고는 인간의 진실을 다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적에 어머니나 선생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신화를 들으며 성장합니다. 그 중 ‘흥부와 놀부’ 이야기는 그야말로 허구입니다. 하지만 스님, 이 허구를 왜 이야기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이야기가 왜 과학이 발달한 이 시대에도 끊임없이 전해 내려오고 있겠습니까? 스님은 진정 어렸을 때에 들은 신화와 전설이 어른이 되고 나면 필요 없게 된다고 할 수 있으십니까? 아이 때의 심성이 설화나 전설의 영향을 받아 올바르게 확립되었다면 그것은 평생의 삶을 좌우할 것입니다. 스님께서 신화와 전기를 무가치한 것으로 표현하는 모습은 마치 아이를 향해 동화를 들려주는 어머니를 향해 왜 아이한테 거짓을 들려주느냐고 호통 치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스님이 지적하신대로 부처님의 전기가 확실히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스님, 왜 경전을 편찬한 과거의 분들은 부처님의 생애를 이런 방법으로 기술했을까요? 스님께서는 초역사적이고 초인간적인 모습으로 부처님을 표현하려 했던 과거 경전을 편찬 하신 분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고민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부처님의 위대한 진실을 일러주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드러낼 수 없는 위대한 내면과 겉으로 드러낸 지고한 행을 무엇을 가지고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설화와 전설의 형식을 빌려 중생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바로 그 점이 불교를 왜곡시켰다고 하실 테지만 그것은 스님의 기우이실 수 있습니다. 스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사람들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신화적 표현이 중생을 우매하게 만든다는데 동의할 수 없으며, 범행을 닦는데 장애가 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도리어 신화화 되고 전설화 된 부처님에 의해 중생의 마음에 법에 대한 공경심이 생기고 믿음이 강해지며 청정한 도를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저도 얼마 전 불자들과 함께 인도 부처님 성지를 순례했습니다. 그 가운데 스님이 언급하신 바 있는 ‘천불화현터’에 갔습니다. 부처님의 신통 사례가 구체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성지입니다. 거기서 불자들에게 제가 “부처님이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니를 위해 설법하고 오셨다는 사실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은 웃으며 오히려 저를 향해 대답하였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얼마나 훌륭하셨으면 이런 이야기가 생기게 되었느냐는 것이었고 우리들은 그 이야기가 사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감동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스님, 불교가 지혜를 중시하는 종교라 인간의 지성과 이성만을 필요로 할 것 같지만 그에 못지않은 감성도 필요로 합니다. 종교에는 이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불교의 신화와 전설은 그대로 전승 수용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스님은 불상이 부처의 본래 모습이 아닌 설화로 만든 형상이라 괴이하기 짝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불상은 공경과 공양의 대상이 아니라 폐기처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불상을 안 모시던지 보통사람의 형상을 한 불상으로 대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신화와 기적의 요소를 그토록 거부하신다면 역시 경전의 적지 않은 양을 소각하던지 창고에 쌓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진실의 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화다’라고 한 말을 믿으시겠지만 저는 ‘진실의 적은 신화 속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무지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문제는 신화와 전설로 기술된 경전과 부처님의 행적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 있는 부처님의 진실을 발견 못하는 어리석음이라 생각됩니다. 정말 가리키는 손과 보아야 할 달의 비유를 실감하게 합니다. 부처님 행적 가운데에 신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가르쳐주어야지 신화를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는 말씀은 합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연기 등 궁극적인 지혜는 이해 아닌 실현

다음 한 가지는 스님의 글 내용 중 부처님의 호칭에 대한 부분입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을 ‘싯다르타’라고 시종일관 호칭하셨습니다. 알려진 대로 부처님에게는 여래, 응공, 정변지, 세존, 천중천, 대웅, 각황 등 많은 호칭이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호칭을 두고 ‘싯다르타’라는 이름을 써야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스님은 그 이유로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스님, 저는 이 부분 또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부처님을 부처님이라 호칭하지 않고 싯다르타라는 속명으로 호칭해야 부처님의 역사성과 인간성이 부각되는 것입니까? 부처님을 부처님이라고 호칭하면 부처님의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면이 상실된다는 말씀인데 부처님에 대한 호칭과 부처님을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면을 밝히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요?

경전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 부처님을 고타마라고 부르거나 싯다르타라고 부른 이들은 불교를 믿지 않은 사람들이나 외도들이었습니다. 부처님께 귀의한 제자들은 절대로 그와 같은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부분에 대해 부처님이 자신의 성을 부르거나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점입니다. 부처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여래라고 호칭해야지 세속의 이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스님께서는 출가제자의 신분으로 부처님을 이제부터 부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거침없이 싯다르타라고 부르면서 앞으로도 그렇게 호칭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이 출가한 후에도 속명을 썼으니까 스님도 부처님을 그렇게 부르겠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스님께서 지금부터라도 사람들에게 스님을 향해 윤씨라고 부르거나 속명을 부르라고 해 보십시오. 이러한 말씀이 사리에 맞는 말씀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의 논리는 팔에 찬 팔찌를 빼려다 팔목을 부러뜨리는 형국으로 오히려 부처의 몸에 피를 내시는 격이라 여겨집니다.

다음은 초전법륜의 연기에 관한 부분입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초전법륜을 소개하시면서 연기는 이해되는 것이지 깨닫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스님께서는 경전에 나오는 1250인의 아라한들도 연기를 이해한 것이지 연기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안냐따(annata)’의 용어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스님의 설명대로 이 안냐따라는 용어는 ‘알았다’, ‘이해했다’는 의미의 지(知)와 해(解)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냐따는 역시 스님이 언급대로 이렇게 단순한 앎이나 이해라는 의미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닌 궁극적인 앎, 완전한 앎의 의미인 ‘요달(了達)’로 풀이됩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안냐따의 이와 같은 의미 중에 단순한 앎인 지(知)나 해(解)만을 강조하고 요달(了達)에 대해서는 비중을 두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리셨습니다. 저는 안냐따에 대한 스님의 이같은 해설은 충분치 않다고 느낍니다. 저는 도리어 지(知)나 해(解)보다는 요달(了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연기는 단순히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몸소 체득하고 깨달아서 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로 저는 ‘쌍윳따니까야’ 2권에 나오는 싸비따 존자와 무씰라존자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경전을 보면 싸비따 존자가 무씰라 존자에게 연기를 상세히 설명하면서 연기란 “단순한 믿음이나 취향이나 전승이나 분석이나 이해하는 것과는 별도로 여기에 대한 체험적 지혜를 지니고 있느냐?”고 묻자 무씰라 존자는 “그와 같은 부분들에 대해 알고 본다”고 대답하면서 목마른 사람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막을 걸어온 사람이 우물을 보고도 두레박이 없다면 한 방울도 목을 축일 수 없듯 단순한 이해만을 가지고는 연기를 알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물은 연기법에 해당하고, 두레박은 체험적 지혜에 해당하며, 알고 본다는 것은 깨달음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안냐따를 일본학자들이 깨달음의 의미를 지닌 각(覺)이나 오(悟)로 번역했다고 봅니다.

팔찌 빼려다 자칫 팔목을 부러뜨리는 꼴

또한 이러한 시각 외에 어떻게 연기를 이해한 차원에서 청정법안이 생기고 아라한의 과가 증득될 수 있었느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섯 명의 제자가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이루자 이제 세상에 여섯 명의 아라한이 출현하였다고 기뻐하셨습니다. 알려진 대로 아라한은 초기불교에서 수행자들이 얻게 되는 과위 가운데에 최상의 과위로 일체의 번뇌를 멸진하여 고로부터 벗어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아라한이 어떻게 설법을 이해하는 수준만으로 청정법안이 생기고 번뇌가 끊어지게 되었는지 납득이 잘 가지 않습니다. 중생의 번뇌가 어찌 연기를 이해한다고 해서 파괴될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먼저 연기를 이해하고 나서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 계를 받고 수행한다고 하시지만 5비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자마자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제 소견으로 경전에서는 5비구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차례로 깨달아 청정법안이 생겼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남방의 주석서에서도 설명하고 있듯 5비구는 부처님의 연기에 대한 설법을 듣고 수행으로써 직접적으로 연기를 확인, 깨달아 요달한 다음 번뇌를 끊고 열반을 실현했다고 봅니다. 실제 지금도 남방의 선지식들은 집중적으로 위빠싸나를 수행하여 지혜가 생기게 되면 몸과 마음에서 발생되는 연기가 찰나 찰나에 확인되어지고 번뇌가 파괴되는 과정을 보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에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이라는 주장과 연기는 이해의 영역이고 열반은 체험의 영역이라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의 성취와 열반의 실현이고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열반이나 해탈과 같은 실현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음은 스님의 마라 즉 악마에 대한 말씀에 대한 부분입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 열반에 대한 부분을 설명하시면서 마라의 존재를 부처님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갈등, 불안 유혹과 같은 부정적 생각이나 감정을 의인화한 것으로 해석하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스님이 부처님의 입멸에 대한 결단이 스스로의 의도이기보다는 마라의 권청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죄송스럽게도 스님은 과연 부처님을 인천(人天)의 스승이며, 완전한 청정의 성취자이시며, 일체세간의 복전으로 인정하고나 계신가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부처님을 소크라테스나 공자와 같은 성자의 차원으로 알고 계시거나 불교를 하나의 철학적 관점으로만 이해하려는 분으로 비춰졌습니다.

마라에 대한 정체를 경전에서 오온(五蘊)으로 지칭하고는 합니다만 뭐라고 지칭을 하였던 간에 부처님이 마라의 영향을 받아 마음이 흔들렸다는 식의 표현은 부처님의 완전성을 부정하고 부처님을 중생의 단계로 끌어내리는 행위라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중생이 색(色), 즉 물질에 집착할 때에 마라에 붙잡히고 색에 집착하지 않을 때에 마라로부터 풀려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해탈을 성취하신 분입니다. 해탈이란 색·수·상·행·식의 오온의 결박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비록 경전에 부처님에게 마라가 등장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부처님은 마라의 유혹을 받을 수도 없고, 마라의 영향을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경전에 나오는 마라는 부처님의 저런 갈등, 유혹, 불안 등의 부정적인 마음을 의인화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완전하고도 완벽한 경지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유혹과 회유 협박을 행하는 악마를 일부러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스님께서 부처님이 일체의 번뇌를 제거하여 세간의 모든 악마와 외도들을 굴복시키시고 인간과 천상의 공양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신다면 이런 해석은 철회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마음에 갈등이니, 불안이니, 부정적 생각이니 하는 용어를 동원한다면 부처님에 대한 불경이요, 법에 대한 훼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밖에도 스님이 쓰신 글 가운데에 신통, 전법의 동기, 입멸의 과정 등의 부분들이 저를 의혹하게 하고 있습니다만 지면 관계상 거론을 하지 않겠습니다.

지안 스님 무조건 동감하는 것도 이해 안돼

다만 한 가지 아쉽고 안타까운 일은 성지에서 쓴 편지의 또 한분의 저자이신 지안 스님의 경우입니다. 지안 스님은 대승불교의 권위자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러한 분이 시종일관 호진 스님의 입장에 무조건적 동감을 표하시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승의 불타관과 수행관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지안 스님께서 자신의 관점과 견해는 조금도 밝히지 않으신 채 호진 스님의 말씀에 찬성만하고 계신 것은 어찌된 일인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지안 스님께서는 대승의 교학을 신뢰하시면서 후학을 지도하고 계신건지 아니면 신뢰하지 않으면서 후학을 지도하고 계신지요, 만약 신뢰를 하신다면 호진 스님의 불타관에 이의를 제기하셨어야 옳으신 일이고, 신뢰하지 않으신다면 어찌 부처님의 제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대롱 속 같은 식견이 스님의 깊으신 법의 안목을 파악하지 못하고 무례를 끼쳤다면 용서 해주십시오. 올린 글 내용가운데에 미혹이 있다면 스님의 경책을 달게 받겠습니다. 스님의 법체에 평안이 있으시기를 손 모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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