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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경주 기림사와 불국사

기자명 법보신문

불국은 차라리 얻기 쉽지만 추사와 정을 나눔이야

무장사비 단편 찾은 추사 만나려 경주행
초의 스님 ‘불국사 회고’ 등 시 9수 남겨

 

 

▲한파가 경주 기림사를 꽁꽁 얼리던 날 한 노스님이 부처님께 절을 하고 있다. 초의 스님도 이보다 190여년 앞선 1817년 6월 이곳을 찾아 참배했다. 도서출판 동아시아 제공

 


신미(1811)년에 일어난 대둔사 대화재는 반딧불 같은 작디작은 불티 하나가 거대한 법당 9동을 전소시킨 사건이다. 범해의 ‘동사열전’ ‘완호강사전’에는 당시 상황을 “신미년 2월 가리첨사(加利僉使) 두 사람이 이경(二更, 오후 9~11시)에 절에 도착했다. 두 관리와 보조하는 이가 횃불을 들고 창고에 들어갔다가 불씨가 떨어진 줄도 몰랐다. 이로 인해 가허루(駕虛樓), 천불전(千佛殿), 대장전(大藏殿), 용화당(龍華堂), 팔해당(八解堂), 적조당(寂照堂), 지장전(地藏殿), 약사전(藥師展), 향로전(香爐殿) 등이 하루 밤 사이에 전소되었다.”고 한다.


이 참사로 소실된 도량의 재건을 발원한 이는 완호(1758~1826) 스님이다. 그는 권선 축을 지고 다니며 시주를 구해 차례로 법당을 복원하는 한편 천불전에 봉안할 불상을 조성하기 위해 정축(1817)년 상경하여 화사(畵師)를 구하고, 기림사로 내려가 큰 불사를 일으켰다. 천불전 건물은 이 해 10월에 완공, 점안을 끝냈다. 그가 기림사로 내려가 큰 불사를 일으켰다는 것은 천불전에 봉안할 옥불상을 조성하는 일을 두고 한 말이다.


그렇다면 완호 스님은 무슨 연유로 기림사에서 불상을 조성했을까. 지금까지 천불전 불상이 기림사에서 조성된 연유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경주는 옥이 나는 광산이 있어 손쉽게 옥을 구할 수 있었다는 점과 옥장(玉匠)을 찾기가 쉬웠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여간 기림사에서 만든 옥 불상에서는 방광(放光)과 서기(瑞氣)가 서렸다 전해지고, 대둔사로 이운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이변은 범해의 ‘동사열전’에 자세하다.


11월16일 배로 불상을 운구했다. 큰 배에 700구를 실어 인봉 스님과 풍계 스님이 불상과 함께 탔고, 300구는 작은 배에 실었는데 호의 스님이 동승했다. 동래 오육도에 이르자 큰 바람이 일어 작은 배는 연안으로 돌아가고, 큰 배는 표류되어 11일 만에 일본의 장기도(長崎島) 축전주(筑前州)에 닿았다. 다음해인 무인(1818)년 6월17일, 이 불상을 실은 배가 일본을 출발하여 11일만에 부산진 앞 바다에 닿았고, 7월14일 완도 대진강(大津江)에 도착, 15일에 대둔사로 돌아왔다. 8월15일 새로 만든 천불전 법당에 이 불상을 봉안하였는데 표류되었던 모든 불상의 어깨 위에 일(日)을 써서 그 연유를 기록해 두었다.


사실 대둔사 천불전에 봉안된 1000구의 불상 중에 일본으로 표류되었다가 되돌아 온 것이 700구인 셈이다. 한편 이 불상의 이운은 인봉 스님이 증명법사로 참여했고 풍계 스님은 화사(畵師)로 동승하였으며 호의 스님도 이들과 함께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의 스님이 기림사를 방문한 것은 1817년 6월의 일이다. 당시 그는 한양에서 막 돌아온 후 기림사를 찾았다. 초의 스님의 기림사 방문은 완호 스님의 심부름을 수행하기 위한 것으로 이 불상 조성과 관련이 깊다.

 

 

▲초의 스님이 찬탄했던 경주 토함산 불국사.

 


필자가 경주로 답사를 떠나던 날, 눈이 내렸다. 기상청에서는 전국적으로 많은 눈이 내릴 것이라는 예보를 전하고 있어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기림사로 향하던 날은 쾌청하여 파란 하늘빛이 유난히 맑아 보였다.


경주 함월산 자락에 위치한 기림사는 신라 때 인도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했고 초기엔 임정사(林井寺)라 불렸단다. 643년 원효가 이 절을 중창한 후 기림사로 개명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1863년 화재로 일부 건물을 복원했지만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아 많은 유물들이 잘 보존된 곳이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다운 법력을 지녔다. 부처님께 삼배를 올린 후 막 법당 문을 나서려는데 문살에 비친 겨울 햇살, 석탑의 소리 없는 그림자가 담담한 자취를 그리고 있다. 천년의 고요가 여기에 담겨 있는 듯하다. 심연의 범해(梵海)가 홍시 따는 장대 소리에 사라져 잔잔했던 석탑의 그림자마저 그 빛을 잃었다. 하지만 찰나에 사라진 이 선미(禪味)는 법당의 주련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멀리 보이는 산, 자태를 드러내고(遠觀山有色)/ 가까이 흐르는 물은 소리 없이 흐르네(近聽水無聲)/ 봄은 갔어도 꽃은 아직 남아 있고(春去花猶在)/ 사람이 오는데도 새는 놀라지 않네(人來鳥不警)/ 어느 경우든 다 그 자리에서 드러나고(頭頭皆顯處)/ 사물들의 진체는 원래부터 고요하지(物物體元平)/ 어떤 말로도 알 수 없지만(如何言不會)/ 이는 너무도 분명한 것이네(祗爲太分明)’


초의 스님이 이 주련의 자구를 음미했을까. 기림사 곳곳에는 이렇게 불국(佛國)의 아름다움이 배어난다. 낙토(樂土), 기림사를 등지고 떠나는 우리 일행의 자동차 안에는 말간 홍시 댓 개가 걸렸다.


기림사에서 불국사로 가는 길에 장항리사지서 오층석탑이 위용을 뽐낸다. 겨울 햇살 사이로 보이는 이 탑의 아름다움을 무엇이라 말하랴. 잠시 서서 탑과 눈인사를 건넨다. 오래오래 이 자리에 서 있기를 기원하면서. 이어 석굴암에 다 달았다. 아스라이 감포 앞 바다가 손에 잡힐 듯. 숨이 턱 밑까지 찼다. 뽀얀 흙 길을 방금 비질이라도 한 듯. 정갈한 도량 관리, 이 절의 가풍이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오늘 큰 재가 있는지. 돌계단을 오르는 어르신의 지게에는 부처님께 올릴 공양물이 가득하다. 아마 초의 스님도 불국사에 계시는 동안 이 토함산 석불암 부처님을 친견했을 터. 그러나 초의는 불국사의 정경을 회상하는 ‘불국사회고(佛國寺懷古)’ 9수만을 남겼다. 그는 김대성과 관련된 고사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초의 스님이 찬탄했던 경주 함월산 기림사.

 


‘김대성 자란 마을 아직도 그대로인데(生長大成尙有邨)/ 오랜 역사 모량리, 부운리가 되었구나(牟梁萬古變浮雲)/ 복안이 발원한 인연으로 태어난 아들이니(福安熏發因緣子)/ 누가 점개 스님 보내 육륜을 설했나(誰遣開師設六輪)’
김대성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세우기를 발원한 인물. 그의 원력은 만고에 빛난다. 초의 스님은 김대성이 이룩한 불국토에 와서 그의 공적을 칭송한 것. 초의는 이 시 하단에 사지(寺志)를 인용하여 “재상 김대성은 전생에 걸인이었다. 점개(漸開)라는 스님이 육륜법회를 위해 복안의 집으로 시주를 왔다가 (걸인을) 인연이 되어 만났다. 걸인이 구걸한 돈을 시주하니 그 발원으로 인해 후일 김대성으로 태어나서 모량에 살았다. 지금은 부운 마을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했다.


‘추사 선생 오래도록 길에 있는 것, 생각하기 어려워(苦憶先生久在行)/ 자하문 밖 맑게 갠 하늘을 보네(紫霞門外看新晴)/ 세상에서 불국은 차라리 얻기 쉽지만(佛國人間寧易得)/ 서로 만나서 편안한 정을 다할 수 있을까(相邀始可遂閒情)’


초의가 그토록 만나기를 원했던 추사와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817년 4월 29일 추사는 경주 무장사비 단편을 찾았으니 이무렵 경주에 온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추사는 저간의 사정이 있었는지 초의를 만나지 못했다. 학림암 첫 만남이 못내 아쉬워 재회를 바랐던 초의의 심회는 이 시의 행간에 배어난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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