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문헌·승려 오가며 상생 추구
한국, 중국불교 학습하며 때론 압도
|
불교는 일종의 문명이다. 하지만 단지 하나의 중심과 그 주변으로 구성되는 문명이 아니다. 여러 개 동심원이 겹쳐져서 불교라는 문명을 이룬다. 상이한 시공에서 그것은 같고 다르다. 또한 동일한 시공에서도 그것은 여러 갈래다. 불교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인도불교에는 인도대륙의 다양한 문화가 침투했고, 중앙아시아와 그리스문명까지 스쳐 지나간다. 중국불교는 또 어떠한가. 중국재래의 종교와 문화가 타클라마칸을 건너 온 불교와 만났다. 이른바 ‘격의(格義)’를 통해서 불교는 중국문명의 일부가 된다. 이렇게 만남과 소통으로 문명은 더 높은 수준으로 상승한다.
중국에서 불교를 수용한 한국은 또 다른 동심원을 만들었다. 한국불교는 때론 수입자로 때론 생산자로 활동했다. 중국불교사를 보고 있노라면 한국불교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한국불교는 한국에 있기도 하고 중국에 있기도 했다. 중국불교도 마찬가지다. 4세기 말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를 수용했고 6세기 초 신라가 우여곡절 끝에 불교를 수용했다. 빠르게 성장한 고대 삼국불교는 중국불교를 학습하기도 했고 압도하기도 했다. 고구려출신 승랑은 현재 난징(南京) 지역인 섭산 서하사에 머물면서 삼론학의 기틀을 놓았다. 그것은 서역출신 길장이 삼론종(三論宗)을 완성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7세기 당나라에서 활동한 신라출신 고승 원측은 현장 문하에서 배운 이후 자신의 유식학을 완성했다. 그의 유식학 전통을 그가 머문 서명사(西明寺)의 이름을 따서 서명계 유식이라고 부른다. 현장의 제자 규기가 형성한 유식한 전통인 자은종(慈恩宗)과는 다른 흐름을 형성했다. 이후 원측의 유식학은 티베트 불교에 뚜렷한 영향을 끼친다.
신라출신 의상은 당나라에 유학해서 중국 화엄종 제2대 조사인 지엄의 제자가 됐다. 의상이 쓴 ‘화엄일승법계도’는 그의 사제이자 중국 화엄종의 실질적 완성자인 법장(法藏)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의상이 신라로 귀국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법장은 의상을 스승처럼 섬겼고 글을 쓰면 인편으로 신라에 있는 의상에게 보내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이렇게 의상은 신라에 있었지만 중국불교에 관여했다.
원효는 당나라에 직접 유학하지 않았음에도 중국불교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히 그의 명저 ‘기신론소’는 법장이 쓴 ‘기신론의기’의 모델이 되었다. 중국불교에서 ‘기신론’은 대승불교의 교과서이고, 이 책을 읽을 때 지침이 바로 ‘기신론의기’이다. 그들은 원효의 불교를 읽고 있었다.
원측이나 의상에서 볼 수 있듯 중국불교의 학습과 새로운 이해는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기도 했다. 의상은 신라에서 해동화엄을 이끌었고 원측과 규기의 유식학을 종합한 태현은 신라 유가유식종의 흐름을 만들었다. 당나라 말기이후 계속된 중국 선종의 한국 전래는 두 지역 간 불교 교류의 뼈대를 마련했다. 7세기 법랑(法郞)은 당나라에 들어가 선종 제4조 도신의 법을 받아 귀국했다. 8세기 무상(無相)은 중국 쓰촨의 정중사에서 활동하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9세기 초에는 도의(道義)가 당나라에서 남종선을 배우고 귀국했다. 한국 선종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불교도 중국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중국에선 960년 송나라가 들어섰다. 그리고 요나라, 금나라 등이 일어나고 다시 몽골족의 원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을 거쳤다. 신유학의 발흥, 간화선의 완성, 라마교의 등장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런 변화 와중에 고려불교는 중국불교와 소통하면서도 발전했다. 당시 불교 교류의 가장 찬란한 성과는 한국선의 형성과 고려대장경의 완성이다.
한국선의 대표자인 보조지눌은 중국 화엄가 이통현의 ‘신화엄경론’, 혜능의 ‘육조단경’, 대혜종고의 ‘대혜어록’을 읽고 깨달음을 성취했다. 비록 그가 중국에 유학한 것은 아니지만 저런 텍스트를 통해서 자신의 수행을 완성했다는 점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지눌은 바로 자신의 수행 속으로 중국불교의 거대한 전통과 그것의 정수를 직접 끌어들였다. 이에 비해 고려말 태고보우는 원나라에 들어가 석옥청공(石屋淸珙)에게 임제종의 법통을 직접 받아 귀국했다. 나옹혜근은 1348년 원나라로 들어가 임제종 조사 평산처림(平山處林)을 참방하여 법통을 잇는다. 이렇게 고려시대 한국선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완성된다.
고려불교의 또 하나 사건은 고려대장경 판각이다. 이것은 불교전적의 교류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불교 전적의 교류는 일찌감치 시작됐다. ‘고승전’에는 4세기 말 중국 승려 담시(曇始)가 불경을 가지고 요동 지역에서 불교를 알렸다고 말한다. 아마도 고구려 지역에서 활동했을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중국에서 간행된 불전은 꾸준하게 한국불교 속으로 진입했다. 북송 때인 983년 중국에서는 대장경이 완성됐다. 이른바 ‘북송칙판대장경’이다. 고려 성종 10년(991)에 이 대장경 한 질이 고려에 들어온다. 이것은 이후 고려대장경의 종자가 된다.
11세기 초엽 고려 현종 대에 이른바 ‘초조대장경’ 판각이 시작됐다. 수십 년 만에 완성되지만 이후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고 만다. 이후 고려 고종 때 ‘재조대장경’이 완성된다. 당시 동아시아에 유통된 대장경과 불교문헌을 종합한 엄청난 사업이었다. 또한 대각국사 의천은 송나라에서 가서 여러 종파의 장소(章疏)를 수집해 귀국한 이후 ‘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편찬한다. 나아가 이것을 바탕으로 ‘속장경’을 간행했다. 불교 전적은 이렇게 유통되면서 살이 붙고 힘이 붙어 새로운 사유를 촉발한다. 이 때문에 새로운 전통이 출현하기도 한다.
한국불교의 문헌이 역으로 중국에 전해지기도 했다. 고려는 당시 남중국 오월왕이 천태종 전적을 요청하자 제관을 파견하여 중국에서 산실되었거나 고려에서 간행된 희귀 문헌을 전달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각국사 의천은 송나라에서 불교 문헌을 수입하면서도 중국에서 이미 사라진 화엄종 주석서를 전해주기도 했다. 이것은 고려불교가 중국의 불교전통 복원을 위해서 조력했음을 보인다. 조선과 근대에도 문헌의 유통은 계속됐다. 20세기 전반기 중국 난징 금릉각경처 판본 불전이 가야산 해인사까지 도달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불교와 중국불교는 다양한 방식으로 교류하면서 상생했다. 서로 인연이 되어 주었다. 앞으로 한·중불교는 과거 같은 교류를 복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교류할 내용물을 마련하고자 노력도 해야 한다. 내용 없는 교류는 못할 짓이다.
김영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