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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옹방강과 북학파 경화사족

기자명 법보신문

차의 맑은 품성은 사대부가 지향해야 할 덕목

청 문물 수용 북학파
석학 옹방강·완원의
깊은 차 안목에 감동

 

 

▲소동파를 흠모했던 청나라 대학자인 옹방강. 그의 서재에는 소동파의 다구를 그린 ‘파공석조도(坡公石銚圖)’가 늘 걸려있었고 그것은 북학파의 차에 대한 인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림은 중국 연경을 자주 출입했던 유득공의 아들 유본학이 소장하던 ‘파공석조도’.

 


조선후기 청나라 문물을 적극 수용했던 북학파 경화사족들은 당시 문예의 종장이었던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완원(阮元, 1764~1849)이 차에 깊이 심취했던 다인이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들이 차에 조심씩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두 거유(巨儒)의 영향이 컸다할 수 있고, 차의 맑은 품성은 사대부가 지향했던 군자의 덕목과 같다고 이해한 것은 초의 스님을 통해서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연경을 출입했던 이들이 실학사상과 고증을 통해 사실을 규명하려는 학문적인 방법론에 영향을 준 것은 두 거유이다.


특히 옹방강이 동파(東坡, 1036~1101)의 시학을 흠모하여 그의 초상화를 서재에 걸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조선후기 동파의 시학이 일세를 풍미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나 그의 초상화를 서재에 거는 것이 유행되었던 당시의 풍조 또한 이들이 얼마나 옹방강을 흠모했는지를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북학파 경화학계의 이러한 풍조를 확인 할 수 있는 자료가 바로 ‘파공석조도(坡公石銚圖)’이다. 이 석조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얼마 전 인사동 소재 화봉갤러리가 주관한 ‘명선 초의전’을 통해서이다. 이 석조도는 다른 자료를 필사한 서첩 속에 들어 있던 것으로, 한지에 그린 수묵화이다. 농묵(濃墨)과 담묵(淡墨)이 잘 어우러져 절제미가 돋보이는 한 점의 그림 속에서 소동파와 옹방강 같은 시대를 대표하는 다인들의 소박하고 균등미 넘치는 심미안을 느끼게 한다.


이 석조도를 꼼꼼히 살펴보니 이 석조는 제량호(提梁壺)인데 구연부(口沿部)가 넓고, 물대가 힘차게 뻗어 있는 것이 방박진 절품의 다구이다. 둥근 석조의 몸통 중앙에는 해서체로 ‘원우(元祐)’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원우(1086~1093)는 바로 북송 철종의 연호가 아닌가. 당시 소동파의 나이 50~63세가 되었을 무렵이니 이 시기에 석조를 장만하고, 이를 기념하여 새겨둔 것은 아닐까.


이 석조도의 오른쪽 상단에 행서체(行書體)로 쓴 제문(題文)이 있는데 자유분방한 서체, 엄정한 골격을 갖추고 있어 이것을 그린 사람의 문자향(文字香)이 묻어난다. 전체적으로 단아하다는 느낌을 주는 이 석조는 어떤 용도로 쓰였던 물건일까. 바로 차를 다릴 때 쓰는 다구(茶具)이다. 물을 끓이는 그릇으로, 돌로 만들었기 때문에 석조라 부른 것. 소동파의 석조가 그림으로 그려져 조선에 전해진 연유를 조금 더 살펴보자.


소동파의 명은 소식(蘇軾), 자는 자첨(子瞻)이다. 그의 아버지 소순과 아우 소철과 함께 삼소(三蘇)라 칭해졌던 인물로, 당송팔대가로 칭송된다. 북송 인종 때 사천성 미산(眉山)에서 출생해 8세에 도인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그의 아버지 소순 또한 문재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던 인물. 동파의 문재를 처음 알아본 이는 구양수(歐陽脩,1002~1072)였다. 1056년 소순은 아들의 시를 가지고 구양수를 찾았는데 이때 구양수는 동파의 시를 극찬했다고 전해진다. 그해 가을 아우와 함께 진사가 된 후, 예부에서 주관한 과거에 급제했지만 모친의 갑작스런 별세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탈상 이후, 그는 아우와 함께 특별 시험인 제과(制科)에 합격해 산시성 봉상부의 첨서판관(簽書判官)으로 임명된다. 1068년 신종(神宗)이 즉위한 후 개혁파인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이 시행되면서 (신법의 주요 내용은 중앙정부의 물자 조달을 합리화하기 위한 균륜법(均輪法)과 빈농을 보호하기 위한 청묘법(靑苗法)이다.) 이를 비판했던 그는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는다. 이후 지방관으로 좌천되는 등,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겪던 동파는 1079년 조정을 비판하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였다. 이후 황주(黃州)로 좌천되어 어렵게 사는 동안 여기에서 ‘적벽부’를 짓는다.


그가 자신의 호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 한 것도 이 무렵. 1085년 신종이 죽은 후 철종의 어머니 선인태황후의 섭정하면서 다시 복권되어 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知制誥)에 올랐으나 철종의 친정 이후 신법이 부활되면서 그는 다시 정치적인 질곡의 시기를 맞아 반대파의 시기와 참소로 해남도에 유배되었다가 휘종의 즉위 이후 복권되어 제거옥국관(提擧玉局觀)이라는 명예직에 제수되지만 상경하던 길에 병을 얻어 생을 마친다.


그는 정치적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적벽부’, ‘범증론(范增論)’,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墓碑)’, ‘유후론(留候論)’ 등을 비롯한 많은 명문을 남겼고, 중국 문학사에 그가 이룩한 송시(宋詩)의 발전은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의 이러한 업적은 구양수와 매요신(梅堯臣1002~1060) 등이 송시의 기틀을 마련한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에 사상적 토대는 장자의 제물론과 불교관인데 이는 비애를 주제로 시를 읊었던 전대(前代)의 한계를 과감히 탈피하여 적극적이고도 자각적인 시경(詩境)을 드러냈다. 그의 시는 경쾌함과 절묘한 비유, 유머를 담아 제재(題材)에 구애받지 않았다.

 

초의 스님과 교류하며
차에 대한 인식 변화
소동파 다구 그림 유행

 

 

▲물을 끓이던 다구인 19세기 중국의 제량호.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사람에 대한 애정이 배어 있는 그의 시격(詩格)의 특징은 자유 분망함에 있다.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렸던 문동(文同, 1018~1079)에게 영향 받아 그린 그의 그림은 속기와 기교를 배제한 것으로, 후일 문인화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었던 사상가였고, 문예의 수장이었다.


특히 차의 높은 경지를 이해했던 그는 여러 편의 다시를 남겼고, 다구와 품천에도 특별한 안목을 가졌던 인물로 알려진다. 그의 생존시기인 북송대는 이미 채군모에 의해 황실용 극품차인 소용단(小龍團)이 만들어졌던 시기이고, 채양(1012~1067)이 ‘다록’을 저술한 것도 이 무렵. 심도 있는 차 이론과 예술성이 높은 다구의 발달, 극품의 제다법이 개발되어 극품차가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소동파가 차에 대한 안목을 확충시킬 수 있었던 실질적인 토양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송시(宋詩)의 토대를 마련했던 매요신과 구양수가 대단한 차의 애호가였던 점도 그의 차에 대한 안목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여겨진다.


이처럼 소동파가 살았던 시기는 중국 역사상 가장 난만한 차 문화를 이룩했던 때였고, 차를 즐기며 시화를 감상하던 것이 문인의 일상생활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그의 차에 대한 높은 경지는 시대적인 안목을 토대로, 탈속한 그의 성품이 만들어낸 경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 속에 습윤된 동파의 문예사상은 옹방강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는데 이는 옹방강이 많은 불서를 사경했던 불교인이었다는 사실에도 입증된다. 뿐만 아니라 옹방강의 이러한 학문적 성향은 북학파 경화사족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추사는 그의 집안이 원찰을 둘만큼 친불교적인 분위기였다는 사실 이외에도 그의 친불교적인 성향은 옹방강의 학문적인 성향과 일치점을 보인다.


한편 옹방강이 나빙이 그린 ‘파공석조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추사가 연경을 가는 신위를 위해 지은 전별시에 “소동파의 석조가 지금도 남아 있어 이 그림이 소재(옹방강의 호)의 서재(서화선)를 압도하네(東坡石銚今猶在 圖壓蘇齋書畵船)”라 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1809년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갔던 추사는 옹방강의 서재에 걸렸던 이 ‘석조도’를 보았음이 자명하다.


더구나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파공석조도’의 내력은 거사(居士)가 그려 문암 유본학에게 보낸 것. 유본학은 유득공의 아들로, 이들이 일찍이 연경을 출입했던 인사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이 ‘파공석조도’의 화제격인 제문(題文)은 석조도의 내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소동파의 석조는 우음(尤蔭, 1732~1812)이 소장했다가 지금은 황실로 들어갔다. 그림만이 소재의 벽에 걸려 있다(坡公石銚 尤水部所藏 今入內府 惟圖在蘇齋壁上)


이를 통해 소동파의 석조가 당시 보물처럼 인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우음이 소장했던 동파의 석조가 청 황실에 귀속되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다만 이 귀품의 석조는 다사(茶事)에 능했던 청나라 문인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던 다구였고, 옹방강의 서재 벽에 걸린 이 석조도를 통해 북학파 경화학계는 차를 이해하려는 의식이 싹 튼 것은 아닐까.


동파의 석조도가 옹방강의 서재를 압도할 만큼 대단한 다구였음은 추사도 인정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추사는 연경에 가는 신위에게 이 석조도를 일람하기를 원했고, 더 나아가 신위가 옹방강을 만나 서로 교유하길 소망하는 추사의 마음을 담은 것은 아닐까.

 

 

초의 스님이 직접 사용하던 제량호.

 


▲박동춘 소장
조선후기 최고의 다인이었던 추사가 신위에게 전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었다. 아! 이 ‘파공석조도’는 소박하고 담박한 차의 이상향이 이 그림 속에 담겨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 석조도 이외의 공간이 모두 차의 원융한 경계를 드러낼 무변(無邊)의 석조란 말인가. 이 ‘파공석조도’를 곁에 두고 오래오래 곱씹어 볼 일이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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