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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황상의 ‘초의행(草衣行)’

기자명 법보신문

세상 그 어떤 차가 초의 스님 가려 만든 차만 하랴

다산선생 문하의 두 제자
40년 만에 대둔사서 해후
늙은 모습 처음엔 몰라봐

 

 

▲다산 정약용이 가장 아꼈던 제자이자 추사도 크게 인정했던 황상의 친필본 ‘초의행’.

 


24살(1809)의 젊은 수행승이었던 초의 스님은 해남에서 강진으로 다산 선생을 찾았다. 이는 그가 대둔사로 거처를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어진 이를 찾아 천하를 종횡했던 그의 마음은 다산 선생에게 보낸 편지에 ‘군자를 찾아 온갖 성을 다 돌아다니느라 청산의 봄을 아홉 번이나 보냈다’고 했고, 다산 선생을 만난 후 그의 감격은 ‘덕성과 학업이 나라의 으뜸이고 문장과 자질이 함께 빛나시다’라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정조의 신뢰와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다산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된 것은 1801년 겨울이다. 그는 동리 밖 주막에서 거처하다가 1805년 겨울 보은산방으로 옮겼다. 1806년 가을 다시 이학래(李學來)의 집으로 옮겨 두 해를 머물다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유배지에서의 고단한 삶은 여전하였다.


초의가 다산초당을 찾은 것은 1809년으로, 당시 다산 선생은 귤동 초당에서 강학과 저술에 몰두하던 시기이다. 여기에서 초의는 황상을 만났지만 이들의 만남은 무슨 연유에선지 계속되지 않았다. 하지만 만나야할 인연은 피할 수 없는가 보다. 마현에서 백적산으로 돌아 온 황상은 그 길로 초의를 만나기 위해 일지암을 찾는다. 실로 이들의 만남은 40여년 만에 이루어진 것. 이러한 당시의 정황은 황상의 ‘초의행’ 서문이나 초의가 이 시에 화답한 ‘일속암가(一粟菴歌)’서문을 통해 확인된다. 그렇다면 황상은 무슨 연유로 40년 만에 눈길을 헤치고 초의를 찾았을까. 그 실마리는 황상의 ‘초의행병소서(草衣行幷小序)’에 드러난다.


내가 어린 시절 다산선생 문하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초의가 스승을 찾아왔을 때, 한번 보고 헤어진 이후 나는 백적산 가야에서 농사를 지으며 40여년을 숨어 살았다. 혹 진주에서 온 사람 중에 비슷한 사람을 보면 마음으로 잊지 않았다. 기유(1849)년에 (정약용이 계셨던) 열수에서 돌아와 초의가 계신 대둔사 초암으로 찾아 갔다. 머리가 하얗고 주름이 깊어 알아보지 못하였는데 그의 목소리와 행동을 보고 과연 초의인가 하는 의심이 사라졌다. 추사선생이 보낸 수묵 ‘죽로명선(竹爐茗禪)’을 보니 굵거나 가늘게 음양이 분명하여 노둔한 사람이 함부로 법 삼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룻밤을 지내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돌아 와 ‘초의행’을 지어 보낸다.


(余幼年學習於茶山夫子 草衣迺時衣姑未也 參尋而至夫子 余一見而罷 歸耕於白磧之伽倻野 晦跡韜光 已四十餘春秋矣 或逢陳州來人 得於髣髴者 不忘于中 今年己酉 自冽水還訪草衣於大芚之草菴 雪髮皺 乃無始來未覩之人也 聽其言跡其行 果草衣無疑也 丐見秋史先生所贈手墨 竹爐茗禪之畵 玉環飛鷰之態 非鈍根者流所敢規則也 明燭至曙 留期以歸 作草衣行而寄之)


한번 초의를 보고, (초의를) 본 것은 드물지만(一見草衣見所稀)/ 초의에 대한 칭송 버려둘 수 없었네.(不能棄置歌草衣)/ 차를 마시는 방 위태롭기가 나뭇잎 같고(竹爐之室危如葉)/ 작은 초가집에는 싸리문도 없네(一片草戶不設扉)./ 사람이 지나간 후에야 호랑이 마당을 지나고(虎過庭心人去後)/ 사람의 (?)을 헤아려 호랑이 또한 돌아가네(人度際虎亦歸)./ 가득 쌓인 추사선생의 글씨들(多蓄秋史先生筆)/ 비단에 쓴 왕희지의 난정서도 빛을 바래네(蘭亭繭紙不敢輝)./ 음양의 필력, 글자 밖으로 드러나(陰陽體勢出字外)/ 살아 있는 민머리용과 뱀, 쥐며느리 움직이듯(生禿龍蛇動蛜蝛)./ 만약 동파가 잠시 여기에 계신다면(若使東坡乍在世)/ 만금과 구슬을 주고도 사려하겠지(購之百金兼珠璣)./ 훤칠한 푸른 대나무, 집안 가득 향기로워(十尋翠竹香滿戶)/ 처마까지 가지들이 걸쳐 있구나(枝條入櫩故相依)./ 곳곳마다 대나무 많으니 누가 속되다 하리오(處處多竹誰爲俗)./ 초의의 대나무 모두 다 아름답네(草衣之竹轉芳)./ 더구나 연못에 꽃 그림자 어리고(又有池畔花影亂)/ 미풍에 물결 일자 붉은 자태 더욱 곱다(風微水紋紅欲肥)./ 사람의 인기척에도 놀래지 않는 물고기, 자유롭게 노닐고(魚不驚人自由在)/ 초의스님 여기에서 천기를 즐기는구나(主人於此樂天機)./ 거친 손님 처음 와서 일삼는 것 물어도(野客新到問所事)/ 대나무를 바라보며 세월을 어기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네(但道看竹日無違)./ 스스로 동래동 신선의 자취인가 생각하여(自疑著脚蓬萊洞)/ 도끼 자루 썩는 줄도 모르는 바둑 두기, 생각도 희미하네(爛柯碁局想依俙)./ 나의 산방, 일속이라(我有山房名一粟)/ 쭉 둘러 있는 태고산 뿐이라(唯有太古山長圍).


걸명시 등 시와 노래 교유
황상, 초의 삶과 차 극찬
초의차 위상도 잘 드러나


▲다산 정약용이 가장 아꼈던 제자이자 추사도 크게 인정했던 황상의 친필본 ‘걸명시’.
황상의 두 번째 상경은 1845년 봄이다. 10년 만에 정학연을 찾았던 그는 이 무렵 정황계(丁黃契)를 맺고 송도를 유람하였다. 1849년 경 황상은 정학연의 소개로 추사를 만난다. 추사는 이미 제주도 유배 시절 황상의 시를 보고 그의 문재를 극찬하였다. 이런 사실은 정학연이 황상에게 보낸 편지 속에 추사의 말을 소개한 부분인 ‘내가 제주도에 있을 때 어떤 이가 시 한편을 보여주었는데 묻지 않아도 다산의 훌륭한 제자가 지은 것임을 알 수 있었지요. 그래서 작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황아무개라고 하더군요. 그 시를 음미해보니 두보를 골수로 삼고 한유를 뼈대로 삼았더군요. 다산제자들을 차례로 꼽아 보았지만 이학래 아래로는 이 사람과 대적할 이가 없더군요. 게다가 황아무개는 시문이 한당에도 핍진할 뿐 아니라 그 사람됨이 당대의 고사라 부를만하다 들었습니다. 비록 옛날의 은사라도 이보다는 더하지 못할 겁니다.(在耽時 有一人示一詩 不問可知爲茶山高弟 故問其名 曰 黃某 味其詩 卽杜髓而韓骨 曆數茶山弟 自學也以下皆無以敵此人 而且聞黃某 但詩文直逼漢唐 其爲人可謂當世高士 雖古之隱逸 無以加此)’라 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황상은 초의와 막역한 사이였던 추사를 통해 초의의 시격과 사람됨을 누누이 들었고, 초의가 당대의 이름 높은 문사들과 교유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으리라. 마현에서 돌아온 황상은 단걸음에 일지암을 찾았다. 은일을 자체했던 다산의 고제(高弟) 황상은 지기(知己)를 찾아 초의를 찾은 것이리라. 40년만의 이들의 해후, 이미 늙어 버린 초의의 모습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목소리를 듣고 의심을 풀었다는 황상의 말 속에는 자신도 이미 늙었음을 암시한 것이다. 밤새워 추사의 글씨를 감상하며 이들이 나누었을 고상한 담소, 초의는 분명 차를 다려 황상과 함께 나누었을 것이다.


황상은 추사 글씨의 골기를 ‘음양이 분명하여 나처럼 노둔한 사람이 함부로 법 삼을 만한 것이 아니다’라 평했다. 하여튼 40년만의 아름다운 만남이 후 황상은 초의에게 ‘걸명시(乞茗詩)’를 보낸다. 초의 스님도 황상에게 ‘일속암가(一粟菴歌)’와 ‘차운기부일속암주인(次韻寄答一粟菴主人)’을 지어 화답했고 차를 보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의 걸명의 변은 당시 초의차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차를 잘 만드는 육우, 이름만 들었고(陸羽善茶但聞名)/ 뛰어난 건안차의 명성 소문으로만 전해지네(建安勝負獨傳聲)/ 승뢰, 배수(같은 좋은 차)는 귀만 따가울 뿐(乘雷拜手徒聒耳)/ 초의스님 가려 만든 차만은 못하지(不如草師搴衆英)/ 차 싹과 퍼진 잎 함께 덖는 새로운 법 터득했으니(竹葉同炒用新意)/ 북원 이후로는 초의스님이 집대성 했네(北苑以後集大成)/ 명선이란 아름다운 호 추사께서 주셨고(茗禪佳號學士贈)/ 추사가 초의에게 준 호이다(秋史贈草衣號)/ 초의차의 명성은 유산에게 들었네(草衣茶名聽先生)/ 유산은 좋은 차를 초의차라 하였다(酉山茶之善者謂之草衣茶)/ 나의 계곡에는 남쪽의 은택이 미치지 않으나(我溪不及南零者)/ 오히려 좋은 물(箭泉) 있어 살 만하다네(猶能可居箭泉下)/
석가여래께서 태자로 계실 때 백리고를 세워놓고 화살 하나를 쏘아 북 일곱 개를 맞추었다. 화살이 땅에 박히자 샘물이 솟았다. 병든 사람이 마시면 모두 나았다. (이 샘물을) 전천이라 불렀다(如來太子時 竪百里鼓 放一箭透七鼓 箭入地 泉水潭出 病人飮則皆愈 名箭泉)/ 그대에게 청하노니 자용향(같은 좋은 차)을 아끼지 마오(諸君莫惜紫茸香)/ 향기로운 차도 속된 배(魚眼松風塵肚俗)/ 창자에서 서너 번 돌아서 나오는 것이니(腸腸三迴四迴瀉)


▲박동춘 소장
이 시는 황상의 ‘걸명시’ 전문이다. 이 시를 통해 당시 초의차가 당대를 풍미했고, 명선이 추사가 초의에게 지어
준 호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구나 육우의 품차는 소문만 무성하고 승뢰 배수같은 명차도 초의가 만든 차만 못하다고 했다. 좋은 차는 초의차라는 정학연의 칭송은 당대 명사들의 초의차에 대한 인식이 아니었을까. 송대의 최고의 차품을 만들었던 북원(北苑) 이래 새로운 제다법의 완성은 초의에 의해 이룩되었다는 황상의 말은 초의차에 대한 굳은 신뢰를 드러낸 것이다. 이 걸명시 한 수는 초의의 명성을 길이 남게 하였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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