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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히말라야의 선물 인더스강

기자명 법보신문

문명의 젖줄 따라 라다크는 태어났다

 

▲인더스강과 잔스카르강이 만나는 님부의 합류 지점. 흙빛의 인더스강과 비취빛의 잔스카르강은 한 줄기가 된 후에도 섞이지 못한 채 한 동안 나란히 흘러간다.

 

 

길을 나서기 전 잠깐 회의가 열렸다. 달랑 두 여자가 의기투합해 나선 이번 여정의 리더는 여행사 사장인 민선예 씨다. 씩씩한 그가 우리를 안내해줄 가이드와 운전기사에게 대략적인 계획과 방문지를 설명하고 일정을 맞춘다.


현지의 도로 사정은 델리에서 들었던 것에 비해 그리 나쁘지 않은 눈치다. 몇몇 도로가 폭우로 유실돼 도보로 이동해야 하고, 비포장 상태여서 거리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다는 점만 미리 감안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사실 가이드는 도로보다 식당 사정을 더 걱정한다. 레 시내를 벗어나 시골 마을로 들어가면 외국인들의 입맛에 맞을 만한 식당이 많지 않다는 것. 간혹 식당이 아예 없는 지역도 있어 식사를 해결하기 쉽지 않다며 우리보다 더 걱정이다.


“그럼, 여러분은 어떻게 식사를 해결하나요?”
가이드에게 되물었다.
“아침에 도시락을 싸서 출발하거나 길가 노점 식당에서 국수 등으로 대충 때우죠.”
간단히 해법을 찾았다. 우리도 도시락을 싸거나 노점 식당을 이용하자 했더니 “정말 그렇게 하겠냐”며 몇 번을 되묻는다. 그들 눈에 우리는 분명 이방인이다. 그것도 까탈스럽고 소심해 보이는 동양의 여행객. 그렇게 비춰지고 싶지 않았는데, 이 보이지 않는 거리를 좁히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차량을 점검하고 이것저것 필요한 짐을 챙기는 동안 라다크에 대해 간단히 복습을 해본다. 라다크는 10세기 초 혼란에 빠진 티베트제국의 일부 티베탄들이 서쪽으로 이동하며 세운 독립 왕국이었다. 티베탄들이 히말라야 서부에 살던 이란계의 다르드족, 그리고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맥 근처에 살던 아리안계의 몬족을 병합해 건설한 왕국이 바로 라다크다.


라다크왕국은 그 후 약 900여년간 번성했고 외세의 침략을 받는 혼란기를 거쳐 지금은 인도의 최북단 잠무·카슈미르주에 편입돼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의 문화나 관습, 종교적 특징은 티베트에 가깝지만 1974년에 이르러서야 처음 외국에 개방된 덕에 라다크의 독특한 전통, 특히 티베트불교의 특징은 정작 티베트보다도 더 잘 보존돼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라다크의 종교는 티베트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사실 이 지역에 처음 불교가 전파된 것은 3세기 아쇼카왕에 의해서다. 이후 이곳에 불교가 뿌리내렸다는 사실은 라다크왕조가 세워지기 한참 전인 720년 경 이 지역을 순례한 신라 혜초 스님의 기행문 ‘왕오천축국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혜초 스님도 라다크의 신심 기록

 

 

▲바스고에 들어서자 길가 곳곳에 세워진 초르덴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섭미라국(카슈미르)에서 동북쪽으로 산을 사이에 두고 보름정도 가면 대발률국과 양동국 그리고 사파자국(현재의 레 인근)이 있다. 이 세 나라는 모두 토번의 관할 아래에 있는 나라다. 옷 입는 복장과 언어 풍속이 모두 천축국과 다르다. 이 나라 사람들은 가죽 옷과 모직 옷, 적삼, 가죽신, 바지 등을 입는다. 땅이 좁고 산천이 매우 험하다. 절도 있고 스님들도 있으며 삼보를 공경하고 신봉한다.…”


땅이 좁고 산천이 험하기는 혜초 스님 순례 당시나 지금이 별반 다르지 않고, 절과 스님들이 있으며 삼보를 공경하기도 변함없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다’는 말이 이곳 라다크에서는 천년이 지나도록 통하지 않은 것일까. 하지만 혜초 스님이 오직 두 발에 의지해 걸어간 길을 어찌 오늘에 비할까.


호랑이가 나온다는 라다크의 고봉준령을 목숨 걸고 넘었을 혜초 스님께서 오늘의 라다크를 보신다면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감탄사를 내놓으실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오늘부터 시작될 여정을 혜초 스님의 순례와 비교하는 것은 언감생심 발칙한 생각이다. 우리를 태우고 갈 자동차를 기다리는 이 호사로움 속에서 불쑥 고개 든 맹랑함에 죽비를 내리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레 시내는 후에 둘러보기로 하고 도시 외곽, 북서쪽으로 먼저 방향을 잡았다. 첫 번째 목적지는 바스고다. 레의 서쪽으로 약 40km 가량 떨어져 있는 이 작은 마을은 레에 합병되기 전 옛 바스고왕국의 수도였다. 40km라는 거리를 우리의 도로 사정으로 가늠해본다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겠지만 시간을 넉넉히 잡고 출발한다. ‘고갯길의 땅’이라는 라다크의 지명을 염두에 둔 까닭이다. 하지만 레 주변의 도로 만큼은 기대 이상으로 말쑥하게 포장돼 있다. 비록 왕복 2차선이지만 레 시내를 벗어나자 건물이나 가로수 등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까닭에 도로는 제법 고속도로의 느낌을 준다.


외곽으로 나오자 낯선 자연이 본격적으로 그 본색을 드러낸다. 얼룩말처럼 줄무늬를 감고 있는 순도 100% 바위산과 드문드문 보이는 키 높은 나무들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다. 사막을 가로지르듯 바위산 사이 계곡을 헤집고 들어가는 이 길은 잠무·카슈미르주의 주도 스리나가르까지 이어지는 라다크의 대동맥이다. 중국에서 출발한 실크로드의 상인들이 세계 최고 품질의 모직물인 캐시미어를 찾아 서쪽 카슈미르까지 발길을 재촉했고, 서역의 상인들 역시 향신료를 싣고 비단을 찾아 동으로, 동으로 이 길을 걸어갔다. 그들의 발자취가 대지 위에 남고 길이 되어 오늘 이렇게 차로 달리는 좋은 시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반듯한 길이 끝나고 계곡으로 접어들자 산허리를 감아 도는 길옆으로 거대한 강이 동행을 시작한다. 세계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인더스강, 그 초입이다. 교과서에서 보고 듣던 그 저명한 강과의 만남이 이렇게 허름한 길가에서 퍼득 이뤄지니 한동안 실감이 나질 않는다. 허나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더니 인더스강의 물살, 그 위풍은 가히 보는 이를 압도할 만하다. 바위산 계곡을 휘감으며 얼마나 달려왔는지 물살은 가쁜 숨을 토해내듯 일렁이고, 거침없는 흐름은 사자의 걸음처럼 당당하다. 라다크의 땅을 닮은 황토빛, 아니 흙빛의 인더스강. 얼핏 보기엔 걸쭉한 진흙탕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강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는지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인더스강이 시야에 들어오자 가이드 텔렉 남걀 군이 드디어 물 만난 고기다.

 

“인더스강은 히말라야산맥을 가로지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죠. 빙하가 녹아서 흐르는 강물은 히말라야의 여러 산맥에서 흘러내린 다른 강들과 합류하면서 잠무·카슈미르지역을 가로지르는데 그 속도가 무척 빨라요. 그래서 레프팅을 하기위해 일부러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강에 빠졌다가는 차가운 물 때문에 엄청 고생하죠.”


텔렉은 신이 난 듯 설명을 계속하지만 우리말을 전혀 못하는 그의 영어를 이해하기위해 한참동안 신경을 곤두세우며 듣기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하지만 손짓까지 해가며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에선 인더스강에 대한 자랑스러움이랄까 애정이랄까, 그런 것이 잔뜩 묻어난다. 이 거칠고 메마른 고산의 계곡을 거쳐, 인도 대륙을 가로지른 후 아라비아해까지 줄기차게 흘러가는 이 장대한 강은 그 자체로 비교할 수 없는 경외의 대상이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또한 이 강을 따라 인도문명이 꽃을 피웠으니 자부심과 애정을 갖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으리라.


티베트 남서쪽 카일라스에서 발원한 인더스강은 라다크 산지의 계곡을 따라 북서쪽으로 흐른 후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파키스탄을 관통한다. 인더스강 유역은 대부분 연 강수량이 500mm 미만으로 건조하지만 히말라야의 빙하가 녹아 흐르는 인더스강의 변함없는 수량 덕분에 사람들은 강에 기대어 농사를 짓고 문명을 발달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라다크왕조 역시 인더스강을 따라 자리를 잡고 성장했으니 오늘의 라다크를 키워낸 젖줄 역시 이 인더스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동안 인더스강에 눈길을 고정시킨 채 그 강인한 생명의 힘에 경의를 표했다.


용광로 같은 인도 빼닮은 강

 

 

레에서 스리나가르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옛 캬라반들의 무역로이기도 했다.

 


그런데 잠시 후 눈앞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바스고 인근 님부라는 지점에 이르자 인더스강은 위쪽에서 흘러들어오는 잔스카르강과 합류를 시작했다. 그런데 잔스카르강의 물빛이 마치 옥가루를 풀어 넣은 듯 선명한 비취빛이다. 그 빛 고운 강은 계곡을 빠져나오자마다 흙빛의 인더스강과 만나는데, 마치 어깨에 기대듯 인더스강 줄기에 기대어 한 참 동안을 그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하나의 강에 흐르는 두 색의 강물. 어찌나 두 물줄기의 색대비가 선명한지 마치 강 가운데로 보이지 않는 가로막이라도 놓여있는 듯 하다.


라다크산맥을 따라 오느라 흙투성이가 된 인더스강에 비해 잔스카르산맥의 가파른 계곡을 갓 빠져나온 빙하 녹은 물, 잔스카르강은 더 맑고 더 차갑다고 한다. 이 수온 차이로 인해 두 강은 한줄기가 된 후에도 한 동안 섞이지 못한 채 나란히 흘러가는 것이다. 하지만 잔스카르의 차고 푸른 강물은 결국 인더스에 동화되어 님부를 떠날 즈음에는 흙빛의 인더스강이 되어 있었다.


결코 서두르지 않지만 결국엔 모든 종교와 사상, 문화를 녹여 하나로 만들어 버리는 인도의 용광로같은 저력이 바로 인더스강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난간도 없는 도로 옆은 바로 벼랑이고 그 아래로 흐르는 강은 사뭇 위협적이지만 그새 인더스에 매혹당한 시선은 쉽게 떨어지질 않는다.


눈은 강물을 따라 마냥 흐르고자 하지만 길은 잠시 인더스강과 헤어져 작은 마을로 들어선다. 사막같이 메마른 길 끄트머리에 푸른빛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곧 마을이 있다는 뜻이다. 나무와 풀이 자랄 수 있는 곳이라야 사람도 살 수 있는 곳이 이곳 라다크기 때문이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티베트식 탑 초르덴이 반긴다. 길가뿐 아니라 보리밭 한 가운데나 가정집 대문 앞 등 사방에 초르덴이 서 있다. 이렇다 할 건물도 보이지 않는 작은 시골마을 바스고는 한때 왕국의 수도였다. 그런 역사를 웅변하듯 마을 전체가 굽어보이는 산꼭대기에 그 옛 영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을 왕궁과 오색 타르초가 바람에 펄럭이며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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