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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남종화 대가 소치 허련

기자명 법보신문

초의가 싹틔운 재능 추사 만남으로 만개

 

▲초의 스님이 상주했던 해남 대흥사 일지암 연못. 소치 허련이 상세히 소개했던 일지암 연못 정경과는 다소 다른 모습이다. 동아시아 제공

 

 

대둔사 한산전에서 인연
초의 후원으로 그림 연마
추사에게 소치 그림 소개
격 갖춘 출중한 인재 칭송

 

소치 허련(小癡 許鍊, 1809~1893)은 19세기 대표적인 남종화의 대가로써 시·서·화에 능했던 인물이다. 그의 이러한 재능을 한 눈에 알아 차렸던 추사는 “압록강 이동(以東)에 소치만한 화가가 없다”고 칭찬했다. 더구나 헌종이 그의 그림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그의 명성은 중앙에 널리 알려졌다. 그가 수준 높은 문예의 안목을 지닐 수 있었던 배경에는 초의 스님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가 초의 스님과 어떤 인연으로 만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대둔사(현 대흥사) 한산전(寒山殿)으로 초의 스님을 찾아간 것은 1835년의 일이다. 그의 ‘몽연록(夢緣錄)’에는 초의 스님과의 첫 해후를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을미(1835)년 대둔사 한산전(寒山殿)으로 초의 스님을 찾아 갔다.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고, 방을 빌려 주어 머무르게 했다. 수년을 왕래하다보니 기질과 취미가 서로 같아 오래도록 변하지 않았다. 그가 사는 곳은 두륜산정(頭輪山頂) 아래이다. 소나무가 울창하고 대나무가 우거진 곳에 두어 칸 초가집을 지었다. 늘어진 버드나무가 처마까지 내려왔고 작은 꽃들이 섬돌에 가득히 어우러져 뜰 가운데에 파둔 상하의 연못에 어렸다. 크고 작은 나무통을 만들어 두었다(乙未年 入大屯寺之寒山殿 訪草衣 款曲仍借榻留寓 往來數載 氣味相同 至老不改 其住處則乃頭輪山頂之下也 松深竹茂處 縛箇數楹草室 垂柳拂簷 么花滿砌 掩映交錯 庭中鑿上下池榮下 設大小槽)


초의의 괄목할 만한 그림 솜씨는 이미 다산(茶山)의 요청으로 그린 백운도(白雲圖)와 다산도(茶山圖)에 드러났기 때문에 소치의 그림에 대한 안목은 일지암에 머물면서 한층 더 나아졌을 것이라 짐작된다. 초의의 소치를 위한 배려와 조력은 그가 자유롭게 해남 윤씨의 가장본(家藏本)인 공재(恭齋)의 화첩과 ‘고씨화보(顧氏畵譜)’를 열람할 수 있게 한 것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초의의 후원은 평소 윤두서의 후손인 윤종영(尹鍾英), 윤종민(尹鍾敏)과 윤종정(尹鍾晶), 윤종심(尹鍾心), 윤종삼(尹鍾參) 등과 서로 간의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공재의 ‘가전보회(家傳寶繪)’와 ‘윤씨가보(尹氏家寶)’에서 윤두서와 윤덕희 등의 화첩을 본 후 그의 감동은 “수일간 침식을 잊을 정도”라 할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가 윤씨의 가장본을 토대로 그림을 연마했던 저간의 사정은 “(윤종민에게) 그림과 화보 등 진장해 온 것을 빌려달라고 하면 반드시 들어 주었다. 지금 책상에 놓여 있는 ‘고씨화보’ 4권도 그가 빌려 준 것이다(畵與譜珍藏者 有求必借 顧氏畵譜四糾之今在案頭者 是也)”라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소치의 그림에 대한 열의와 탁마(琢磨)가 빛을 발하게 된 시기는 1839년 봄이다. 당시 초의 스님은 1838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이듬해 두릉으로 가는 길에 추사에게 소치의 그림을 소개하였다. 추사는 한 눈에 그의 재주를 알아 본 것. ‘몽연록’에는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말했다.


허군의 그림 격조는 거듭 볼수록 더욱 묘해 이미 격을 이루었다고 할만합니다. 다만 보고 들은 것이 좁아 그 좋은 솜씨를 마음대로 구사하지 못하니 빨리 서울로 올라와 안목을 넓히는 것이 어떨지요(許君畵格 重見益妙 已足成格 特見聞有拘 不能快駛驥足函令上來 以拓其眼如何)
(초의에게) 이 같은 출중한 인재를 어찌 손을 잡고 함께 오지 않았소? 가령 서울에서 지낸다면 그의 향상은 상상하기가 어려울 것이오. (그의) 그림을 보면 마음 가득 기쁨으로 넘치니 즉시 서울로 올라오게 하시오(如此絶才 何不携手同來 若使來遊京洛 其進不可量也 見之滿心歡喜 卽圖京行)


소치의 인생 여정에 중대한 전환이 이 편지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그가 문예의 거두 추사의 제자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초의가 그에게 보낸 후원의 힘은 여기에서 빛을 발한 것이다. 이렇게 연결된 이들의 인연은 종신토록 아름다운 만남으로 이어져서 이들의 변치 않는 사제의 정은 후인의 귀감이 되기에 족하다. 유쾌한 이들의 여정을 좀 더 따라가 보면 이 해 8월 초의의 편지를 받은 소치는 내종형을 따라 상경한다. 이들이 초의 스님과 조우한 것은 소사 근처인데 칠원점(漆院店)에서 하루를 묵는 뒤 소치는 추사에게 보내는 초의의 편지를 가지고 추사 댁을 찾는다. 추사를 처음 뵙게 된 그의 마음은 ‘몽연록’에 자세히 기록해 두었다.


나는 남대문을 지나 바로 장동에 있는 월성댁에 도착해 쉬었다. 초의선사가 전하는 편지를 올리고 곧 추사선생에게 인사를 드렸다. 처음 만나는 자리였지만 마치 옛날부터 서로 아는 것처럼 느껴졌다. 추사선생의 위대한 덕화가 사람을 감싸는 듯했다. 그는 당시 상중(喪中)이었다. 여막(廬幕) 북쪽 문으로 상제 한 분이 들어왔는데 바로 산천선생(김명희)이었다. 처음 보는 데도 관대하게 대했다. 조금 있다 추사공의 계씨 금미선생(김상희)이 들어 왔다. 역시 옛날부터 알았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소치가 월성 댁을 찾았을 때는 추사가 상중에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바로 1837년 3월30일 김노경이 돌아가신 것을 말한다. 하지만 추사는 상중인데도 소치에게 여러 형제들을 소개하였고 아들 상무도 이때 알게 되었다. 이후 소치는 추사 댁의 큰 사랑에 머물며 추사의 화품(畵品)에 대한 논평을 경청했고 추사의 필법을 연마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아무튼 추사와의 이 인연은 소치의 일생에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다.

 

 

초의 스님이 그린 다산도.

 


서울로 불러와 직접 지도
그림 논평에 필법도 전수
19세기 남종화 대가 성장
헌종도 소치 그림 애호가


소치는 본래 진도 태생이다. 그의 본관은 양천 허씨로, 그의 선대는 명문 후예였지만 점차 몰락하여 평민으로 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이름은 련(鍊)과 유(維)를 함께 사용하였고, 호는 소치(小癡) 이외에도 노치(老癡), 치옹(癡翁), 석치(石癡), 옥주산인(沃州山人) 등을 사용하였다. 소치(小癡)는 추사가 그에게 지어 준 호이다. 추사는 그에게 원말(元末) 중국 산수화의 대종사(大宗師)라 칭송되는 황공망(黃公望)과 예찬(倪瓚)을 본받게 하였다. 한편 초의 스님이 일지암을 중건한 것은 1830년이다. 그는 이 암자를 중건한 후 상경하여 두어 해를 서울에서 보내다가 내려와 이곳에 머물렀다.


소치가 1835년 초의를 찾았을 때 (초의가) 두륜산정 아래에 살았다는 얘기는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특히 소치는 일지암의 정경을 상세히 서술하였는데 암자 주변에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했고 버드나무가 처마까지 늘어졌다는 점이나 섬돌 사이로 작은 꽃들이 가득했고 뜰 가운데 파 논 위아래 연못에는 수목과 꽃들의 그림자가 물에 어려 장관을 이루었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특히 일지암의 뜰 가운데 상하로 연못을 조성했다는 사실은 다산이 초당에 만들었던 상하 연못과 그 구조가 흡사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위에 위치한 연못에서 아래의 연못으로 물이 흐르게 만든 원리는 주역의 이택(麗澤:주역 태괘(兌卦) 군자는 서로 배우고 익혀 이롭게 한다)을 상징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초의가 일지암을 중건하면서 다산의 정원 배치법을 차용하고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밝힐 수 있는 근거이다. 이와 같은 다산초당의 연못의 구조는 초의가 그린 ‘다산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어서 일지암에 조성되었던 연못의 규모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복원된 일지암의 연못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소치는 추사를 위해 초의차를 구해 보냈는데 이러한 사실은 추사가 소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난다.


이번에 부쳐온 차편(茶片)도 초의암에서 나온 것인가. 대단한 품질이라 기꺼울 따름이네. 그대가 간간히 초의암에서 나온 차를 찾아내 인편이 되는대로 다시 부쳐주게. 간절히 바라네(今番所寄來茶片 亦出於草衣庵者也 極佳可喜 君須更爲攫出草衣庵中物 隨便更寄 甚望甚望)


▲박동춘 소장
이 편지는 1850년 추사가 소치에게 보낸 편지로 ‘모완첩(摹阮帖)’ 속에 들어 있다. 아마 그가 초의의 암자에서 만든 차를 구해 스승 추사에게 보냈나 보다. 그가 초의암자에서 나온 차를 색출해 보내라는 재촉은 소치에게 한 추사의 농담이겠지만 차를 진정 좋아했던 추사의 속내를 드러낸 것은 아닐까. 더구나 초의가 만든 차가 ‘대단한 품질이라 기꺼울 따름이라’는 추사의 품평은 당시 초의차가 완성되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1850년경에 만든 초의차는 이미 추사를 감동시킨 신묘한 차였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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