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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지혜 밝힌 동아시아 선불교 성전

기자명 법보신문

스님 법어집에 經붙인 것은 단경이 유일
혜능 스님 가르침의 큰 줄기는 안심법문
대범사 보살계 계단에서의 설법내용 담아

‘육조단경’은 육조혜능 스님의 법어집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에만 붙이는 경(經)이라는 명칭이 유일하게 사용된 경전입니다. 동아시아 선불교의 성전과도 같은 이 경전은 한국불교에서도 ‘금강경’과 함께 소의경전으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본지는 종광 스님의 ‘금강경’ 이야기가 중도에 연재되지 못하게 됨에 따라 경주 기림사 법회에서 대중들을 대상으로 강의했던 종광 스님의 ‘육조단경’을 새롭게 연재합니다. 강의는 성철 큰스님이 번역한 ‘돈황본 육조단경’을 저본으로 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편집자

 

 

‘육조단경’ 강설을 통해 선수행과 깨달음의 정수를 전했던 중국 선종의 6조 혜능 대사가 오조 홍인대사 문하에서 수행할 때 일했던 호북성 황매현 오조사 방앗간.

 

 

서언(序言)

“혜능 대사가 대범사 강당의 높은 법좌에 올라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무상계를 주시니, 그 때 법좌 아래에는 스님·비구니·도교인·속인 등 일만여 명이 있었다.


소주 자사 위거와 여러 관료 삼십여 명과 유가의 선비 몇몇 사람들이 대사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해주기를 함께 청하였고, 자사는 이윽고 문인 법해로 하여금 모아서 기록하게 하였으며, 후대에 널리 행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함께 이 종지를 이어받도록 서로서로 전수케 한지라, 의지하여 믿는 바가 있어 이에 받들어 이어받게 하기 위하여 이 ‘단경’을 설하였다.”(惠能大師 於大梵寺講堂中 昇高座 說摩訶般若波羅密法 授(受)無相戒 其時座下 僧尼道俗 一萬餘人 韶州刺史韋 (據) 及諸官僚(寮)三十餘人 儒士餘人 同請大師說摩訶般若波羅蜜法 刺史遂令門人僧法海集記 流行後代(伐)與學道者 承此宗旨 遞相傳授 有所依(於)約 以爲 承 說此壇經)


어떤 스님이 조실 스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큰스님 가을바람에 나무가 시들고 낙엽이 뒹구는 소리를 들으면 어떠하십니까. 그러자 조실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체로금풍(體露金風)이다. 즉 가을바람에 본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가을은 몸에 달고 있던 불필요한 잎사귀나 가지를 다 털어 버리는 시기입니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추위를 견뎌야 합니다. 그래야 따듯한 봄을 맞이해 다시 새싹을 틔울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삶 또한 자연의 이치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때로는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많은 것들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 오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자식을 낳아야 하고 또 자식들을 결혼 시켜야 합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어떻게 보면 굉장히 소중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가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달려 살아가는 것들이 궁극적으로 삶의 본질도 자신의 본질도 아닙니다.


체로금풍(體露金風)은 운문문원(雲門文遠·864~949) 스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다 털어버리고 나면 오롯하게 자기가 드러납니다. 자연의 이법(理法)은 우리 삶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간절함과 지극함이 수행의 요체


‘육조단경(六祖壇經)’은 육조혜능(六祖慧能·638~ 713) 스님의 법어집입니다. 아마도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스님의 법어집에 경(經)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육조단경’이 유일할 것입니다. 그만큼 혜능 스님은 중국불교가 낳은 위대한 천재로 또한 스승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불교학자나 종교학자들은 혜능 스님을 기독교의 베드로에 비견하기도 합니다. 베드로라는 천재가 나와 기독교가 찬란한 꽃을 피웠듯이 육조혜능이라는 천재가 나와 찬란한 선불교(禪佛敎)가 동아시아에 활짝 만개를 한 것입니다.


선불교는 수행하는 불교입니다. 불교는 믿는 것에 그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반드시 실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행(信行)이라고 합니다. 불교를 믿고 실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는 불교의 행자입니다. 수행자입니다. 기도와 염불, 간경, 참선 모든 것들이 수행입니다.


혜능 스님은 서기 7세기 사람입니다. ‘육조단경’의 성립도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에 이뤄진 것입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변함없이 우리들에게 위대한 경전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을 밝히는 방법은 똑같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육체와 달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마음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부산합니다. 그럼으로 번뇌와 고통이 생깁니다. 혜능 스님은 바로 이 마음을 밝히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혜능 스님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마음을 편안케 하는 법문이라는 뜻입니다. 혜능 스님의 가르침은 스승인 오조홍인(五祖弘忍·601∼674) 스님부터 비롯됐습니다. 홍인 스님의 가르침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고 하는데 이는 홍인 스님이 귀주 황매현 동빙무산에서 가르침을 폈기 때문입니다. 홍인 스님은 그곳에서 700여명의 제자들을 가르치며 크게 선풍을 드날렸는데 동산법문의 대의가 바로 안심법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편안케 할 수 있을까요.


일례로 돈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돈이 생기면 편안해 지겠지요. 자식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자식이 개과천선(改過遷善)해서 말을 잘 듣게 되면 마음이 편안해 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편안함은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편안함이 아닙니다. 일시적입니다. 궁극적이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유한한 육체와 수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져도, 아무리 아름다운 미모를 가져도 결국은 사라지고 스러질 뿐입니다. 그러니 잠시 상황이 호전됐다하더라도 그것은 지엽적인 것으로 마음은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을 안심(安心) 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가르침을 한마디에 응축시킨 것이 바로 수일불이(守一不移)입니다. 하나를 굳게 지켜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을 한곳에 모아서 흩어지지 않게 하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다만 그 하나의 대상이 가변적이거나 쉽게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구하려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는데 수시로 변해버리면 마음이 편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변하지 않는 무언가에 전심으로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그것이 수일불이입니다. 스님들은 공부를 할 때 화두(話頭)라고 해서 아주 강한 의심덩어리 하나에 마음을 모읍니다. 거기에 온 생각을 쏟아 붙습니다. 거기에 익숙해지면 번뇌와 망상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여러분이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을 하거나 부처님께 예배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절하고 지극하게 하면 번뇌는 사라집니다. 다른 잡념 없이 오로지 그 하나에 마음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또 이렇게 하면 무엇이든 성취가 됩니다. 그것이 무한한 마음의 힘입니다. 어떤 수행을 하든 간절하고 절실하게 온 마음을 다해 오로지 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절로 편안해 집니다.


우리의 강의 교재 ‘육조단경’은 중국 돈황에서 발견된 것을 성철 큰스님이 번역하신 것입니다.


자, 먼저 서언입니다. “혜능 대사가 대범사 강당의 높은 법좌에 올라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고 무상계를 주시니, 그 때 법좌 아래에는 스님·비구니·도교인·속인 등 일만여 명이 있었다.”


이 내용은 혜능 스님께서 법문을 하시게 된 과정을 설한 것입니다. 모든 경전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금강경(金剛經)’의 경우 어떻게 시작합니까.


“여시아문 일시불 재사위국 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 천이백오십인구”(如是我聞 一時佛 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 千二百五十人俱). 무슨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법을 설하셨는지를 밝힌 것입니다. 이를 육성취(六成就)라고 합니다. 모든 경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육조단경’도 경전의 형태를 띠고 있는 까닭에 다른 경전과 마찬가지로 어디서, 누구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법회가 시작됐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혜능 스님은 대범사에서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 법문이 바로 마하반야바라밀법(摩訶般若波羅蜜法)입니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무상계(無相戒)를 주셨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은 무엇입니까. 마하(摩訶·mahā)는 크다(大), 반야(般若·prajñā)는 지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마하반야는 큰 지혜입니다. 혹은 위없는 지혜가 됩니다.


그리고 바라밀(波羅蜜·pāramitā)은 피안(彼岸)으로 간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도피안(度彼岸)으로 번역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또는 고통스런 상황이 차안(此岸)이라면 그 고통과 번뇌가 소멸된 곳. 이곳이 피안입니다. 그러니까 마하반야바라밀은 큰 지혜로써 고통스런 생사(生死)의 언덕을 지나 열반의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혜능 스님은 마하반야바라밀을 설함으로써 우리 마음속에 내재돼 있는 맑은 지혜를 회복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무상계(無相戒)를 설했습니다. 무상계는 선종의 새로운 보살 수계 방식으로 무상심지계(無相心地戒)라고 합니다. 흔히 비구 250계, 비구니 350계 등으로 불리듯이 계를 주고 받기 위해서는 명확한 계율의 항목이 있고, 또 특정한 의식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을 가르치는 선종에서는 일체 중생의 본성이 본래 맑고 깨끗한 것임을 전제로 스스로 서원하고 계를 받습니다. 따라서 혜능 스님이 설법을 듣는 대중들과 함께 스스로 맹세하는 방식으로 계를 수계하고 있습니다.


무상계는 대승의 새로운 수계방식


물론 이런 대중적인 계의 방식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혜능 스님이 열반하신 이후 안녹산의 난이 일어납니다. 본래 넷째 며느리였던 양귀비와 불륜에 빠진 현종이 정사를 그르치자 결국은 난이 발생한 것입니다. 현종은 당시 지금의 청두까지 도망갔다가 수년 후에 다시 수도였던 시안으로 돌아옵니다. 물론 도망가는 도중에 양귀비는 교살을 당합니다. 목이 졸려 죽는 것이지요. 도성에 돌아와 보니 모든 것이 폐허가 돼 버렸습니다. 그러자 도성을 다시 재건하는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 재건사업에 스님들도 참여하게 되는데 바로 계단(戒壇)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계단을 열면 사람들이 모이고 또 돈을 냅니다. 어떻게 일종의 방위성금입니다.


▲종광 스님
혜능 스님에게는 다섯 명의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하택신회(荷澤 神會·684~758) 스님이 당시 계단의 단주였습니다. 기록에 보면 신회 스님의 계단에 25만 명이 모였다고 하는데 이때를 기회로 신회 스님은 혜능 스님의 현창(顯彰) 운동을 벌입니다. 앞으로 이런 역사적인 배경도 조금씩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찌됐든 육조단경의 단(壇)은 바로 이 계단(戒壇)의 의미임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계속〉

 

종광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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