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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현각 스님의 ‘서리와 소나무 같은 지조로 자신을 정제하고 물에 담긴 달처럼 마음을 비우고 사람을 대하라(霜松潔操 水月虛襟, 상송결조 수월허금)’는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자신 또한 그렇게 살았던 석주 스님은 열다섯에 출가 후 선학원에서 만해를 비롯해 석두, 효봉 스님 등 고승들로부터 평생 승려생활의 지침이 될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해인사 은경 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을 배우고는 참된 효도의 의미를 새겼고, 이때의 감명과 인연은 평생 ‘부모은중경’을 만들어 많은 이들에게 법보시하는 계기가 됐다. ‘부모은중경’을 통해 효를 강조했던 스님은 생신 상을 차리려는 대중들을 설득해 그 비용으로 ‘부모은중경’을 찍어 법보시 하는 등 참된 효를 알리는 일에 적극 나섰다. 특히 1971년 총무원장 시절 샘터사 요청으로 작성한 ‘어버이의 은혜’ 주제의 글에서 ‘독자들 중에서 부모님의 은혜를 알고자 하는 분이 칠보사로 연락을 주면 무료로 ’부모은중경‘을 보내주겠다’고 써 놓은 후, 칠보사는 1년여 동안 매일 백여권의 ‘부모은중경’을 발송하는 것이 큰 일거리가 되기도 했다. 스님은 그렇게 평생 10만권 넘는 ‘부모은중경’을 법보시했다.
스님은 대중들에게 “마음이 없는 자리에는 효가 있을 수 없고, 효가 없는 행위에는 사람의 향기가 나지 않게 된다”며 효를 강조했다. 그리고 본인 역시 아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어머니 생각을 하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들곤 한다”고 했을 정도로 마음 속 깊이 ‘효’를 새기며 살았다. 그런가하면 은사 남전 스님으로부터 ‘부모님께 진정으로 효도하는 길은 네가 참부처가 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던 석주 스님은 선교 양면에 걸쳐 정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어느 해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에게 ‘마삼근(麻三斤)’ 화두를 받아 한철 정진을 마친 스님은 그곳에서 ‘구도자란 반드시 출가한 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참된 삶을 살고자 계를 지키는 일에 노력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 가르쳤던 한암 스님에게 ‘범망경’을 배우고는 계를 지키며 바른 생활을 해야 올바른 정에 들 수 있고, 정에 들어야 밝은 혜가 생겨나 일체중생과 함께 하는 보살행을 구현할 수 있음을 터득했다. 스님은 훗날 “‘범망경’이 출가의 의미를 확실하게 심어주었다”고 회고했다.
범어사 강원에서의 6년 배움과 오대산 상원사 등 제방선원에서의 참선수행을 통해 출가수행자로서 갖춰야 할 자질을 담금질 한 스님에게 지남이 된 또 하나의 불서는 ‘선가구감’이다. 선과 교를 두루 살핀 스님은 이때의 심경을 “서산대사의 ‘선가구감’에 경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6년 동안 강원교육을 받으며 부처님의 말씀에 젖어들었고, 연이은 안거 기간 동안 선풍을 쐬며 우리 모두에게 구비되어 있는 부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역경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발족한 국문선학간행회의 첫 번역서로 ‘선가구감’을 선택했다. 스님은 당시 만해의 제자 용담 스님이 원저자 서산대사의 마음을 담아 번역한 ‘선가구감’을 일러 “‘선가구감’ 번역본 중 따라올 책이 없다”고 칭송했다. sjs88@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