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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 전 총무원장 지관 큰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 교계
  • 입력 2011.05.16 08:59
  • 수정 2012.01.02 19:43
  • 댓글 0

“전통 외면하면 더 이상 과거도 미래도 없어”

올해 세수로 80을 맞은 지관 스님은 한국 근대불교사의 상징적인 존재다. 1947년 출가한 스님은 봉암사 결사를 시작으로 수행자이자 교육자로서, 불학연구의 최고 권위자이자 종교지도자로서 늘 한국불교의 한 가운데에서 한국불교 중흥을 견인해왔다. 탁월한 혜안과 불퇴전의 수행력으로 후학양성과 교학중흥에 수많은 업적을 남긴 스님은 우리 한국불교의 자존과 자긍심을 높인 선지식으로 일컬어진다.


지난 2009년 10월, 스님은 4년간의 조계종 총무원장직을 원만히 수행하고 많은 스님과 불자들의 감사와 존경의 박수를 뒤로 한 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을 떠났다. 오랜 세월 갈등과 다툼이 끊이질 않던 불교계에 남긴 화평한 종권교체의 전범으로 평가받았다.


이후 스님은 매일 경국사와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을 오가며 필생의 서원으로 후반기에 접어든 ‘가산불교대사림’ 편찬 작업을 비롯한 저술 작업에 오롯이 매진하고 있다. 그동안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일체 거절하며 두문불출하던 스님이 오랜만에 지면을 통해 대중과 마주했다.


지난 4월28일 오후, 총무원장 퇴임 이후 처음 이뤄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스님은 인생관, 세계관, 학문관에 대해 진솔한 말씀을 들려주었다. 종단 현안과 관련해서는 말을 아꼈고, 다만 조계종이 추진 중인 5대 결사와 관련해선 “결사란 사부대중이 화합해 특별한 규범을 정하고 실천하기로 약속하는 일이며, 그에 따른 구체적인 실천이 뒤따를 때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관 스님은 불법을 제대로 기억하고 배우는 절집공부의 전통이 활달하고 그 전통의 유산을 존중하는 사회가 함께할 때 우리 모두의 미래도 안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남수연 기자

 


승가 대중공화 전통은
인류사의 독특한 유산
소중한 유산 파괴하며
새로운 시작은 불가능


▶큰스님께서 올해 팔순을 맞으시고 출가한지도 65년이 되셨습니다. 큰스님께서 지금까지 삶이나 일상의 지표로 삼으셨던 경구나 가르침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불법과 교단을 사심 없이 걱정하시는 선지식들이 모여 의논하시고, 그런 어른들에 의해 대중원융살림이 특별하게 현전했던 해인사에서의 초심(初心)과 평생을 하루같이 부처님의 교법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점이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빛을 감추어 머금고 있는 한국불교의 전통유산은 한국사회에서뿐 아니라 세계인류에게 있어서도 생명계의 의내명주(衣內明珠)와 같다’고 하신 바 있습니다. 한국불교가 갖는 특별한 가치나 의미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한국불교는 선교(禪敎)의 전승과 계율전통에 있어 중국이나 일본불교와는 다른 독특하고 힘 있는 역사와 전통을 이어왔습니다. 늘 강조해 왔지만 율장과 청규 등 불교교단의 역사를 살펴보면 승가의 대중공화전통은 인류사에 가장 독특하고 자랑할 만한 유산입니다. 그 유산을 가장 잘 보전전승해온 한국불교를 이웃나라 불교도들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사적 토대인 가족은 물론 생산과 잉여활동을 근거로 한 사적인 소유를 단호하게 뒤로하고 오직 공적인 대의만으로 살 수 있도록 마련된 곳이 절집입니다. 근본적으로는 대단히 영웅적이기에 무상법(無上法)이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꽃 속에 빙설처럼 살아가야 하니 위태롭고 힘든 여정입니다.”


▶예전과 달리 우리 사회도 경쟁과 개인주의가 심해지고, 이런 점은 승가에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물신(物神)을 섬겨야만 잘 살 수 있게 된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그렇고, 교단과 불교인이 더욱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장 등 교단사를 되돌아보면 부처님 재세시에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세간은 탐진치 삼독으로 늘 불타고 있었고, 부처님은 그 한가운데에서 비법(非法)을 다스리고 정법대중을 수순해 가며 승가의 초석을 마련하셨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출가생활 65년이면 불교계도 많이 변했을 것 같습니다. 큰스님께서 출가하시던 때와 오늘날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불편한 세상을 피해서가 아니고 세간을 위해서 분심(奮心)으로 출가하는 젊은이들이 그립긴 합니다. 설사 인생의 길이 보이지 않아 느닷없이 절문안에 들어선 가여운 젊은이들이라도 불법을 배우고 익혀 정법의 역군이 되도록 선도하는 선배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1947년 자운율사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셨는데 15세 때 출가를 결심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경상북도 청하면 유계리는 신라시대부터 인문이 자리 잡은 아름답고 소박한 경주이씨 집성촌입니다. 그 곳에서 태어나 5세에 어머니를 여윈 저의 어린 시절은 캄캄하고 아득했습니다. 병치레도 남달리 하여 열병에 시달리는 내가 세상을 버릴까 두려우신 아버님은 어린 나를 마을 인근 조그만 암자에 내려놓고, 산을 내려가시곤 하였습니다. 스님은 늘 입속으로 나를 위해 염불을 외우셨고, 정신이 들면 산을 내려가 집안일을 돕고 마을 훈장님께 글을 배우곤 하였습니다. 14세가 되었을 때 아버님마저 여의었고, 생사의 캄캄한 장막이 다시 내 인생을 뒤덮고 있었을 때, 해인사에서 탁발 나오신 용명 스님을 만나 해인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해인사에서 탁발 나온 용명 스님의 법문은 어떤 내용이었나요?
“나는 그 때 뜨거운 불속에 있었고 스님은 ‘불타는 바다를 건너는 불법(佛法)이 있다’는 위로의 내용이었습니다. 해인사는 예로부터 지형이 바다에 뜬 배의 형상(行舟形局)이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불타는 생사의 바다를 건너 해인의 큰 배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인류 역사도 그렇지만 특히 불교사에는 수많은 기록들이 남아있고 기록을 전승하는 일들을 대단히 중요시합니다. 불교에서 전통과 전승을 그토록 중시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과거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제대로 나아갈 수 없게 됩니다. 승단에서도 출가자가 삼장을 의지해 삼학을 성취하고 정법을 전승하는 일이나, 선지(禪旨)를 깨달아 종통을 계승하는 사법(嗣法)을 가장 중요한 관건으로 여깁니다. 이는 부처님의 지혜와 방편이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한 특별한 전승장치입니다. 소중한 우리들의 유산을 파괴하거나 외면하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법의 유산인 불법을 제대로 기억하고 배우는 절집공부의 전통이 활달하고 그 전통의 유산을 존중하는 우리사회가 함께할 때, 우리 모두의 미래도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봉암사 결사는 정화운동의 초석이 됐을 뿐 아니라 조계종의 정체성 확립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도 봉암사 결사에 참여하신 것으로 압니다. 봉암사 결사가 큰스님의 삶에 영향을 준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봉암사결사는 후기에 동참했고 초심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눈 밝은 스승들이 종풍의 횃불을 높이 들고 용맹정진하시던 시절이었습니다. 특히 그 후에도 장삼을 수하시고 남산 국립도서관을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시며 율장을 샅샅이 열람하시고, 수계전통을 복원해 가시던 은사 스님의 행적은 저에게 큰 지남(指南)이 되었습니다.”

 

물신 팽배한 현대에서
승가도 고군분투 직면
세상 피해서가 아니라
세간 위한 출가자 절실

 

 

▲조계종 총무원장직에서 물러난 스님은 매일 경국사와 연구원을 오가며 ‘가산불교대사림’ 등 편찬 작업에 오롯이 매진하고 있다.(사진 왼쪽) ‘가산불교대사림’은 연구원 내 20여명과 연구원 외 10여명이 참여하는 대단위 작업이다. 스님은 원고를 집필하는 동시에 연구원들의 원고를 일일이 검토하고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꼼꼼히 수정한다.(사진 오른쪽)

 


▶큰스님께선 4년간 총무원장으로 계시면서 많은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이중 많은 분들이 결계와 포살의 정례화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대중을 위해 마지막으로 봉사하라는 은사 스님과 부처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소임 중에 결계와 포살전통을 복원하였습니다. 결계는 일체대중이 빠짐없이 공의의 현장으로 들어오게 하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면 민주시민의 권리를 실현케 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대중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결계의 공간이 합법적으로 마련되면 대중들은 그 곳에서 논의하고 탁마해 화합하는 길을 모색하게 됩니다.”


▶스님들도 예전과는 달리 여건상 대중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큰스님께서 대중생활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얼굴을 마주대하는 공론의 장이 확장되고 현전하면 분쟁과 불화의 장이 소멸됩니다. 그래서 ‘승가(Sam+gha)’는 어원 그대로 ‘함께 하며 화합한다’는 공화(共和)의 뜻이 분명합니다. 공의의 장에 떳떳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익명의 그늘 뒤에 숨어 불선업을 일삼는 이들에 의해 실상이 왜곡되고 파승(破僧)의 불행한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승가는 대면전통을 소중히 여깁니다. 봉암사결사에서도 그 단초가 되었던 유교법회에서도 얼굴과 이름을 내건 당당한 대중들의 화합의 그 힘이 오늘날 한국불교를 있게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난관도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큰스님께선 어려움이 있을 때면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그럴 때면 선배들이나 다른 이들의 더 큰 어려움을 생각합니다. 사전편찬을 시작할 때 발원문을 지어 불전에 올리고 삼천배를 했습니다. 그 발원문 중에 ‘구법 위해 진송제양 당대를 비롯 신라백제 고구려의 스님들이여 죽음조차 무릅쓰고 고국을 떠나 국민을 위한 그 마음은 비할 데 없네. 백명 중에 돌아온 이 열 명 안 되니 후인들이 전인난을 어찌 알리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과거 구법을 위해 살신한 선배스님들을 생각하면 요즘의 난관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견딥니다.”


▶큰스님께서 총무원장으로 계실 때 사람들이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2008년 8월27일 20만명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광장에서 열린 종교편향 불식을 위한 범불교도대회 같습니다. 그 대회는 불자들의 결집과 자긍심을 일깨운 것은 물론 한국불교가 능동적으로 사안에 대처하는 시발점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총무원장으로 난감한 점도 없지 않으셨을 줄로 아는데 소신을 굽히시지 않고 끝까지 범불교대회를 봉행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당시에는 꼭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단과 사부대중들이 적극 동참해서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어쨌든 잘 끝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승가 대면전통 무너지면 파승〈破僧〉 초래”

 

승가 내 다툼 사라져야
국민도 불교 존중할 것
노 대통령 묘비명 쓴 건
남은 이들 위로 위한 것
 

 

 

 


▶조계종에선 올 초부터 수행·문화·생명·나눔·평화의 5결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결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며, 조계종의 결사가 성공하기 위한 과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결사란 사부대중이 화합해서 특별한 규범을 정하고 실천하기로 약속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결사는 큰 원력과 실천을 필요로 합니다. 원력과 그에 따른 구체적인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결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큰스님께서 가장 역점을 두시는 일이 ‘가산불교대사림’이 아닐까 싶습니다. 1982년 처음 발원한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있으신데 대작불사에 대해 “한국정신사의 참다운 자존을 일깨우고 나아가 한국에 있어 불교술어의 일차 결집이라는 사명 아래 소중한 결과물이 되도록 정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세계적으로 많은 불교사전들이 있는데 이 사전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본 사전편찬 작업을 시작하던 1980년 즈음 일본 등 동아시아권에서도 이미 백과사전출간이 종료된 이후이고, 세계적으로도 백과사전시대가 종료되고 장르별 용례사전 등이 기획되던 시기입니다. 한국은 철학 등 사전류들이 일본어판 등을 번안하는 수준에 있었고 이후 불교계도 번안판 사전이 유통됐습니다. 계몽주의시대 유산인 백과사전편수계획을 전면 수정해 일체경음의 등 불교전통에 근거한 최대 어휘결집이라는 명분과 전거에 의한 용례결집과 번역이라는 편수안에 의거해 한국불교 고유의 백과사전편찬이라는 초심을 지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사전편찬 작업은 워낙 고난도에 무한투자와 장기전을 요하는 작업이라 편찬을 시작한 이들이 결과를 보지 못하고 사후에 출간하거나 중도에 폐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는 편집과 제작의 수월성을 제공한 전산시대에 본격작업기를 맞았고 열두 권 출간이라는 결과를 수행할 수 있었지 않았나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부록과 색인을 합쳐 아직 7~8권 작업이 남아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마무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는 있습니다.”


▶큰스님께선 2009년 고 노무현 대통령의 묘비명을 쓰셨습니다. 정치적인 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던 큰스님께서 손수 묘비명을 쓰신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특별한 뜻이 아닙니다. 많은 일들로 힘에 부쳤지만 대중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고심하다 세상을 등졌습니다. 한 개인의 고통을 넘어 나라 안팎이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가족들은 물론이지만 상심한 국민도 당황한 지도자들도 모두 위로받고 안정을 찾는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전국사찰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하는 일들이 단지 유족과 노대통령만을 위한 일은 아닙니다. 남은 자들의 상심과 고통·불안 등이 미래를 위한 성찰과 지혜 또는 큰 덕으로 승화되게끔 인도하고 보살피는 일이 절집에서 수행하는 천도의례의 깊은 뜻입니다.”


▶여러 조사결과 2000년대 중반 이후 불교계의 대사회적 위상이 많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톨릭에는 뒤지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불교계가 대중의 신뢰와 존경을 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가톨릭은 내부적인 문제가 밖으로 쉽게 표출되지 않지만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다 드러내는 승가의 전통대로 일을 처리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 전체를 못보고 드러나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승가는 세속과 달라야 합니다. 하지만 출가자들이 다투면 대중의 신뢰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중생활을 위해 주지라는 소임이 꼭 필요하지만 이 때문에 다투어선 안 됩니다. 물이 흘러가는데 있어 뒤의 물이 앞의 물을 거스르지 않듯 대중이 화합해 순리대로 순서대로 소임을 맡아야 합니다.”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20세 때로 돌아간다면 이것만은 꼭 하고 싶다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또 반대로 이것만은 꼭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으신지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만 찾아서 하다가보니 벌써 80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후회할 일도 그럴 시간도 없습니다.”


▶큰스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물건이 있다면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끼는 물건은 없습니다. 그래도 소중히 여기는 무엇인가를 말하라고 한다면, 정법문중의 후배 스님들과 도량을 외호하며 수행하는 재가불자 등 사부대중입니다. 교단의 식구들이라서가 아니라 정법유산의 상속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늘 불안정하고 어려운 세간에서 불법을 지키고 이어갈 상속자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상속된 유산은 교단의 전유물로서 정체되지 않고 불교외부의 일체중생을 위해 수행될 때 그 빛을 더 할 수 있습니다.”


▶젊은 스님들에게 꼭 당부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십니까?
“따를 선지식이 없다고 말하는 젊은이와 믿을 만한 후배가 없다고 말하는 스승이 있다면 서로에게 모두 불행한 사태입니다. 과거와 미래를 모두 부정하고 나면 불안한 현재만이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사자상승(師資相承)에 의한 사법전통의 핵심은 바로 전통의 과거와 예측 가능한 미래를 담보하는 스승과 제자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미래를 맡길 만한 후배가 있다고 말하는 선지식들이 많아지고, 따를 만한 스승이 있어 충일하다고 말하는 후배들이 우후죽순처럼 많아진다면, 불교중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재가불자들이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아도 좋을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자성(自性)이 청정(淸淨)하면 팔만사천법문이 모두 일미(一味)의 불법대해(佛法大海)로 통하고, 자성이 미혹하면 불보살님이 함께 하고 있어도 만날 수 없습니다.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설왕설래하는 수많은 중생들의 번뇌사이로 그 만큼의 불보살님들도 동행하고 계십니다. 많은 불자님들이 불보살님과 함께 하셨다는 뜻밖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1957년 해인사 일주문 앞의 지관 스님(사진 왼쪽). 해인사 법보강원 강주시절의 지관 스님 모습(사진 오른쪽).

 

 

 

지관 스님의 잊지 못할 세 분의 은사인 자운, 운허, 영암 스님(지관 스님의 서재에는 세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지금도 매일 아침 분향한다).

 

 

 

해인사를 찾은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지관 스님.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지관 큰스님은
1932년 경북 영일군 청하면 유계리에서 태어난 스님은 1947년 합천 해인사에서 자운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근대 한국불교의 대강백이었던 운허 스님 문하에서 수학한 스님은 1959년부터 1970년 해인총림 강원에서 10여년 간 학인들을 지도하면서 많은 전승교학 주석서를 찬술했다. 38세 때인 1970년 최연소로 법보종찰 해인사 주지를 맡아 대중을 외호했으며, 이후 1990년대 후반까지 동국대에서 후학양성과 교육행정을 선도했다. 자운 스님의 율맥을 이은 지관 스님은 율장과 교단사를 정리했으며, 특히 1986~1990년 제11대 동국대 총장을 역임하며 종립교육도량의 진흥에 헌신하기도 했다.

2005~2009년 조계종 제32대 총무원장으로서 종단 중흥과 사회계도에 진력했으며, 1991년 설립한 가산불교문화연구원에선 스님 평생의 원력으로 시작한 한국불교 최초의 불교대백과사전과 그간 연구성과들이 본격 간행기를 맞아 대중에게 회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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