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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사의 의미와 역사-김상영 중앙승가대 교수

기자명 법보신문
  • 집중취재
  • 입력 2011.05.16 16:25
  • 수정 2011.05.17 18:05
  • 댓글 0

혜원의 백련결사가 시초…타락한 교단 자정 위한 개혁

삼국시대서 근대까지
결사는 다양하게 존재
고려 정혜·백련결사가
한국불교 대표적 결사

 

 

▲봉암사 결사를 주도한 성철 스님과 청담 스님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

 


동북아시아 지역에 전래된 불교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이 지역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불교로 인하여 발생했던 각종 폐단 또한 적지 않았으며 그것이 문제가 되어 불교가 극단적인 탄압을 받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불교가 각종 폐단을 노출시키고 있을 때, 이 같은 상황을 개혁하고자 했던 불교인들의 노력이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다. 특히 불교가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형성되었던 결사운동은 자정적(自淨的) 개혁의 시도라는 측면에서 주목되는 사례이다.


각종 사전에서 결사는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사회적인 결합 관계를 맺음, 또는 그 단체”, “2인 이상의 동지가 공동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합의에 의하여 조합을 만듦, 또는 그 단체” 등으로 정의되고 있다.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조직된 관계를 나타내거나 그 단체를 표기하는 단어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결사라는 단어가 언제,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보아 불교의 신앙결사운동이 전개되면서 결사라는 용어가 널리 확산되었으며,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사전적 의미로 확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동북아시아 지역의 불교사에서 최초로 발견되는 신앙결사는 동진의 혜원(334~416)이 주도한 백련결사이다.
402년 7월 28일, 여산 동림사의 반야대 아미타불상 앞에서 1백 23명의 승속이 모여 서방정토 왕생을 기원하는 염불결사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결사라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고승전’에는 당시의 모습을 “혜원은 많은 무리를 영도하면서 도를 힘써 행하여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그치는 일이 없었다. 석가모니가 남긴 가르침은 여기서 다시 왕성하여졌다. 이렇게 해서 계율에 힘쓰고 욕망을 억제하고자 뜻하는 사람들이나 세속의 인연을 끊고 청정한 신앙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다 기약 없이 모여들고 혜원의 평판을 듣고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혜원은 왕실에 의해 불교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 이후 300년 이상이 경과한 시점을 살다간 고승이었다. 이 기간 동안의 중국불교는 외형상 급성장을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도 하였다.


혜원과 동시대에 살았던 석도항은 ‘석박론’이라는 글에서, 이 시대 불교 교단이 안고 있었던 문제점, 특히 승려들의 정도를 벗어난 행위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한 적이 있다. 혜원은 바로 이 같은 상황을 인식하고 승려 본연의, 또는 불교 본연의 모습을 보이고자 결사적 형태의 수행을 추진하였다. 이후 백련결사는 후대의 결사운동 사례에서 예외 없이 가장 대표적인 결사로, 결사의 전범으로 지칭되고 있다.


우리 역사 속에서 보이는 결사의 사례 역시 매우 이른 시기부터 나타난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몇몇 불상의 조상기를 통해 고구려 백제 등의 신앙공동체적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신라의 경우는 보다 다양한 형태의 기록이 전하는데 이들 내용을 검토해 보면, 삼국시대의 결사는 불상 조성 등의 불사 성격을 띤 결사가 주류를 이루며 통일신라 이후에는 특정 교리나 사상을 배경으로 한 결사가 많다는 점이 발견된다. 특히 9세기 후반 황복사에서 개최되었던 화엄결사는 선 전래에 따른 화엄종단의 갈등과 위기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결사다.


고려시대에도 결사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1129년 지리산 수정사에서 진행되었던 수정결사가 있는데 이 결사를 주도했던 승려는 혜덕왕사 소현의 제자인 진억이다.


그는 “출가한 사람은 한번 해탈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뿐이다. 만일 이것을 빙자하여 높은 명예나 후한 이익을 바란다면 어찌 본심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한 후 자신들의 뜻을 성취할 만한 도량을 찾아 다녔다고 한다.


수정결사에서는 무엇보다 결사의 사주, 즉 주지에 대한 규정을 정해놓은 내용이 주목되는데, 이들은 사주는 교대를 원칙으로 하되 임기는 3년 전후로 한다는 원칙을 정하고 이를 준수하였다. 아울러 이것은 수정사를 오래 지속시키기 위한 방법이라고 밝혀놓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불교계의 주지직을 둘러싼 잡음을 고려한 규칙으로 생각된다.


결사 운동의 근본 취지는
왜곡된 불법 되돌리는 것
인위적 변화 추구보다는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

 

 

▲1947년 봉암사 결사 당시 대중생활의 규칙을 담은 공주규약.

 


고려후기에 이르러 불교계에서는 두 차례의 중요한 결사운동이 전개되었다. 지눌의 정혜결사와 요세의 백련결사가 그것인데, 이들 두 결사는 한국불교사 전체를 통해 가장 대표적인 결사로 평가되고 있다.


정혜결사와 백련결사는 동시대에 결성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두 결사는 현실불교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철저한 수행 위주의 결사운동을 전개해 나갔다는 유사점 등을 지니고 있다.


지눌은 1182년 담선 법회에 참가했던 동학들에게, “이 회가 파하거든 우리는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 동사(同社)를 만들어 항상 선정을 익히고 아울러 지혜를 닦기에 힘쓰며 예불하고 경 읽기와 나아가서는 노동으로 운력하는 데까지 각각 자기 맡은 일을 하자”고 권유하면서 처음 결사를 제의한 바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수행 위주의 결사 정신은 이후 그대로 실천에 옮겨졌다. 요세의 경우는 보다 구체적인 수행법을 제시하였으며 본인 스스로 ‘서참회(徐懺悔)’라는 별칭을 들을 만큼 철저한 참회수행으로 일관하였다. 그는 매일 53불에게 열 두 번씩 절을 하였는데 모진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단 하루를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양대 결사는 구성원들의 철저한 수행운동을 바탕으로 전개되어 갔으며, 이 같은 노력이 당시 불교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오랫동안 한국불교는 침체기에 빠졌으며 의미로운 결사운동 사례 역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물론 조선시대의 불교에서 결사운동의 사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함허득통, 석실명안, 연담유일 등에 의해 결사가 구성되었으며 향도, 계 등의 결사적 신앙체도 여러 차례 결성되었다.


하지만 이 시대의 결사운동은 그 사상성이나 영향력 등의 측면에서 이전 시대의 결사와 비교하기 어려운 면모를 지니고 있다. 다만 조선시대의 결사는 극렬한 억불 상황 속에서 그나마 조선불교를 유지시킬 수 있었던 ‘조선불교의 생명력’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근대 이후의 불교사 속에서는 특히 경허의 결사운동이 주목된다. 그는 1899년 해인사, 1902년 범어사에서 각각 구체적인 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추진했던 결사운동은 지눌의 정혜결사를 그대로 계승하면서 한편으로 창조적 변용을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로 인해 경허는 ‘보조선의 근대적 계승자’로 불릴 만큼 정혜결사 정신을 근대에 구현시키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된다. 현대 불교계에서도 여러 차례에 걸친 결사운동이 진행되었으며, 그 가운데 봉암사 결사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변질되었던 한국불교의 건강성을 회복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이해된다.


최근 대한불교조계종은 범종단 차원에서 5대결사를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결사의 성패 여부는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과거 결사운동이 지향했던 정신과 내용을 다시 한 번 떠올릴 필요가 있다. 지눌의 정혜결사에 동참했던 결사 대중들은 ‘한결같이 부처님 계율대로(一依佛律)’ 살아가고자 하였다. 정혜결사 뿐만 아니다. 혜원의 백련결사에서 봉암사 결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 결사들은 대부분 무엇을 인위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운동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부처님 계율대로’ 살아가자는 다짐을 하고 그 취지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묵묵히 실천 수행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부처님 계율대로’ ‘부처님 법대로’ 살아가자는 일종의 자정적 자각운동, 이러한 노력이 오늘날까지 불교개혁의 성공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불교의 개혁은 여러 가지 방향에서 추구될 수 있다. 특히 현대사회와 같은 환경 속에서 불교는 마땅히 변해야 하고, 그 방법 또한 더욱 다양하게 추구되어야 한다.


▲김상영 중앙승가대 교수
하지만 역사 속의 결사운동은 그 어떤 개혁보다 불법의 본질이 왜곡되고, 수행자의 수행풍토가 타락한 현실을 되돌려 놓는 일에 주력하고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을 중시할 때, 지금의 5대결사 운동은 진정한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김상영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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