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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부인의 죽음

기자명 법보신문

두 아이 먼저 떠나보내고 모진 세월 견뎌
오랜 미움·원망 풀고 편안히 생애 마무리

며칠 전 목동 반야사에서 김 할머니의 49재가 있었다. 바쁜 병원일과를 뒤로 하고 반야사를 찾았다. 그곳에는 평생 증오와 원망의 관계로 살아왔을 가족 아닌 가족들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살아생전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을 존재. 허나 마지막은 산 자나 죽은 자 모두 묵은 한을 내려놓는 화해의 자리였다.


김 할머니가 우리 병원을 찾은 것은 지난 3월초였다. 2년 전 김 할머니가 유방암에 걸렸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손쓰기에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온몸으로 전이된 암세포는 김 할머니의 이번 생이 오래 지속될 수 없도록 했다. 홀로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을 전전하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자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동대병원이었다.


우리 병원에서는 할머니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할머니도 누군가로부터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할머니를 찾아가 얘기를 나누었다. 불자였던 할머니도 종종 휠체어를 타고 법당에 오거나 사람들이 초파일 연등 만드는 모습을 오도카니 지켜보고는 했다. 그런 할머니의 눈빛에 때때로 깊은 외로움이 묻어나기도 했다.


할머니가 둘째부인이었다는 사실은 입원 때 전해 들었다. 같이 온 첫째 부인의 아들은 3년 전 아버님의 마지막 유언이었다며 ‘아주머니’를 잘 돌봐달라고 신신당부했다. 할머니는 종종 “우리 애들을 먼저 보냈다” “그 양반이 나를 굉장히 사랑했다”는 말을 하고는 했다. 이미 결혼해 여러 아이를 둔 남자를 사랑했던 여인. 어쩌면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할머니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거기에 키도 크고 늘씬했다. 2년간 암 투병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도록 얼굴에도 티끌하나 없었다. 젊은 시절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열렬히 사랑했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것이 싫어 한때 피해 다니기도 했지만 결국 운명 같은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비록 그 선택이 또 다른 여인과 아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일임을 뻔히 알지라도.


할머니는 아들과 딸을 낳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채 장성하기도 전에 하나는 교통사고로, 하나는 지병으로 모두 잃고 말았다. 할아버지도 깊은 병에 들자 본댁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렇게 홀로 남은 할머니가 살아왔을 인생이 어땠을까. 또 두 여인을 오가야 했던 할아버지와 자신을 버리고 딴 여인을 찾아간 남편을 지켜봐야 했던 아내의 절망은 어땠을까.


김 할머니가 임종하던 날 저녁 첫째 부인과 그 부인이 낳은 장성한 자식들이 병원에 모였다. 그 노부인은 마치 자신에게 들려주기라도 하듯 “저 사람이 원래 심성은 착한데 어찌어찌 상황이 그렇게 됐을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김 할머니에게 “부디 좋은 데 가라”고 했다.


김 할머니는 모진 세월 억척스레 살아왔던 것과는 달리 편안한 모습으로 삶을 마무리했다. 가는 사람도 남아있는 사람들도 서로의 맺힌 한을 조금이나마 풀고 달랠 수 있었던 것도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응급센터와 중환자실에 ‘미소부처님’을 보시했다. 모든 사람들이 저 부처님의 미소처럼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다.


이제 할머니가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좋은 곳으로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히 다음 생에서는 그토록 애달파 했던 그녀의 아이들과 새롭고 좋은 인연을 시작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대엽 스님 동국대병원 지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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